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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파스칼 키냐르 作, <은밀한 생>
은밀하게, 더욱 은밀하게





“키냐르, 키냐르··· /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박정대 시인의 시 ‘네 영혼의 중앙역’의 일부다. 키냐르, 키냐르 - 한 시인이 마치 마법의 주문(呪文)처럼 중얼거리는 그 이름. 바로 소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1948- )의 이름이다. 키냐르, 키냐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주문의 한 구절 같은 이름이다.

자신의 작품으로 독자를 몽상의 우주로 이끄는 작가. 그런 작가들이 있다. 키냐르는 그런 작가다. 그들은 우리를 부추긴다. 그들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시를 쓰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우리를 기어이 몽상가로 만들고 마는 몽상가들. 그것이 그들의 본령(本領)이다. 키냐르는 작품 속에서 그러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무엇보다 우선 작가 자신을 몽상하게 만드는 책. 그러한 시도 앞에서 <은밀한 생>이 과연 소설인가 하는 평범한 의구심은 시나브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은밀한 생>은 소설이자, 시이자, 에세이이자, 명상록이자, 철학서다. 어쩌면 글로 씌어진 생(生)이라는 곡(曲)의 악보, 또 어쩌면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사랑의 경전(經典)일지 모른다.

키냐르는 “언어는 집단의 수집품”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언어 없이도 삶은 가능하”며, “언어는 사랑에 적합하지 않다”고도 단언한다. 그러나 키냐르는 삶과 사랑에 바로 그 언어로써 접근한다. 언어로써 도전한다. 그토록 불가능하고 부적합한 언어가 작가가 가진 유일한 수단(악기이자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가 처한 모순된 상황은 힘겹고 부조리한 각자의 운명을 어떻게든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우리 모두의 괴로움과 닮아 있다. 그저 생명을 받아 세상에 내던져짐으로써 시작된 삶은 결국 피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귀결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그 과정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사랑의 비밀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은 때로 아름다울지 몰라도 모순과 부조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그녀의 진짜 본성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한 여자를 소유한다 하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소유하지는 못하므로 내가 그녀를 소유한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한 여자를 꿰뚫는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꿰뚫지 못한다. 내가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은밀한 생>에서 키냐르는 끝없이, 그야말로 끝없이 사랑을 말한다. 사랑에는 부적합하다는 언어를 가지고 사랑을 말한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누가 암시해주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느꼈으므로, 느낌을 표현하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그때 사랑이 시작된다. 언어가, 손이, 성기가, 입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깝게 타인에게 다가간다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심장, 말을 안 듣는 사지, 나른해진 몸뚱어리, 굳어진 혀, 수척한 모습, 눈물, 비밀, 홀로 타오르는 육체의 정염, 이러한 것들이 정열적인 사랑의 여덟 가지 증거다.”

“사랑은 말을 하는 두 개인, 두 자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하는 두 정체성이지, 서로 끌어당겨서 욕망을 채우는 두 육체가 아니다.”

“사랑은 따로 떨어져 행해진다. 마치 생각이 따로 떨어져 이루어지듯이, 독서가 따로 떨어져 행해지듯이, 음악이 침묵 속에서 구상되듯이, 꿈꾸기가 잠들어 있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듯이 말이다.”

“왜 사랑은 격렬한 상실 안에서만 느껴지는 것일까? / 왜냐하면 사랑의 원천이 상실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 태어나기,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어두운 황홀경을 맛본 날, 몇 시간 동안은 여자들과 남자들의 눈가에 아직도 거무스레한 무리가 져 있다.”

이 소설에는 뚜렷한 인물도, 확실한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도 더없이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소설 속에 온전히 존재한다. 그 모든 것들이 고운 모래처럼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사랑을 향해 핍진한다.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말, 언어를 통해 침묵하기, 그것이 키냐르의 야심이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책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독자가 수도 없이 곱씹고 되새기고 음미해야 할 단어와 문장들이 행간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한 괴로움이자 더없는 즐거움이다. 번역자인 송의경은 이 작품을 번역하는 데 꼬박 1년 반의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 번역을 고치고 다듬는 데 다시 1년 반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키냐르를 만난 송의경은 작가로부터 <마지막 왕국>이란 작품을 집필하고 있다는 근황을 전해 듣는다. 번역자는 아마도 작가가 그것을 쓰다가 죽게 될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리고 그의 번역자인 자신도 그것을 번역하다가 죽게 될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 예감은 너무도 고요하고 담담한 것이어서 너무도 확고한 예감이 된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뻗어 나와 한 극으로 쏠린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지상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은 표출되어 흘러나온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장소 위로 확장되는 침묵, 스스로를 가리는 육체 위로 확장되는 비밀, 이러한 확장과 닫힘, 넓게 퍼져나가는 대양과 극도의 내밀함 속으로 집중되는 고립된 섬은 다른 누구와도 아닌 오로지 우리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던 어떤 심층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은밀한 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을 은밀하게 만드는 것 - 그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다. 하여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과 같다. 사랑하는 것, 이 책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다. 키냐르는 말한다. “사랑한다, 즉 책을 펼쳐놓고 읽다.”



입력시간 : 2006/12/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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