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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30] 廣州 李氏 漢陰 李德馨
자주국방 몸바친 덕망의 과학자 인터넷 등으로 한음 알리기 온힘

15대 종손 이시우(李時佑)씨 집안 문고·자료·종손 계보도 등도 꼼꼼하게 챙겨 보존












종가의 역사를 보면 어느 집이고 곡절과 애환이 없지 않다. 그중에는 절손(絶孫)의 아픔이나 지손들과의 지루한 대립으로 종가가 고사 직전에 몰린 경우도 있다. 재물이 많아도 말썽이 생기고, 없어도 문제고, 종손이 똑똑해도 탈이고, 무식해도 걱정이다. 종손이 교육을 많이 받고 똑똑하면 종사를 독선적으로 운영해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하고, 반대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종가를 잘 지키고 종사를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한 요체는 무엇보다도 덕망이다.

한음가(漢陰家)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이 집안의 가성(家性)인 덕(德)이다.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남긴 글은 한음선생 문고에 들어 있다. 그 서문을 용주 조경(1586-1669)이 썼다. 조경은 글 말미에 한음 선생이야말로 옛글에서 보던 ‘삼불후(三不朽)’를 실천한 분이라고 결론 맺고 있다. 삼불후란 ??지 않고 영원한 세 가지 즉 입언(立言), 입공(立功), 입덕(立德)을 말한다. 입언은 저술을 통해 길이 남는 것이고, 입공은 국가나 사회에 큰 공을 끼침이며, 입덕은 문자 그대로 덕을 통한 교화의 공을 일컫는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로 입언은 다산 정약용, 입공은 충무공 이순신, 입덕은 퇴계 이황을 먼저 떠올린다.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용주 조경은 이를 충족한 인물로 한음 상공을 인정했다.

임란때 조선 외교 진두지휘

광주 이씨 종손 이시우씨
일반인들은 한음이라고 하면 ‘오성과 한음’을 연상하고 일화 한두 가지쯤을 얘기한다. 그 다음을 물으면 그저 망연할 뿐이다. 임진왜란 극복 과정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서애 류성룡,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병조판서와 정승으로 최고 지휘부를 조직했고, 그 명을 받아 충장공 권율, 충무공 이순신이 야전에서 목숨을 바쳐 막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펼친 외교의 빛난 성과다. 그 책임자가 바로 한음이다. 보통 서애와 충무공의 업적은 꿰고 있으면서도 한음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한음은 오성 이항복보다 다섯 살 아래지만 20세 때 동방으로 문과에 급제한 이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요직을 주고 받아 42세부터 세 차례에 걸쳐 영의정이 되었고,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31세로 양관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전쟁 중엔 대사헌, 한성판윤,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등 요직을 맡아서 국난 극복에 한시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광해군에 의해 유배를 당했던 그가 죽은 후 국왕이 후회의 정을 담은 제문을 내렸고, 이후 인조(1623), 숙종(1692), 영조(1758), 고종(1864) 등 모두 5번의 사제문(賜祭文)이 남아 있다.

한음의 문고에는 백사에게 보낸 편지가 77편이나 들어 있는데, 대부분 국난 타개와 당파 척결에 관해 상의한 내용이다. 그중에는 한음이 손위인 백사에게, '술을 조금 줄이시고 더욱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당부한 내용(惟望 節酒愼攝 進學萬重)'까지 들어 있다.

한음 이덕형 영정 사진
삼불후의 공을 세웠던 한음의 종택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15대 종손 이시우(李時佑, 1943년생) 씨와 부인 한양 조씨(1948년생)가 살고 있다. 종택이 자리잡은 목왕리 일대는 한음의 유촉지로, 조선왕조 때 정승을 지낸 아홉 명의 묘소가 있다고 해서 '9정승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2km쯤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면 남양주군 조안면 진중리가 나오는데, 예전에 긴 제방이 있어서 ‘사제(莎堤)’라 했다. 한음이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정자를 짓고 자연과 벗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땅은 사람으로 인해 이름난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한음의 유촉지이기에 널리 알려졌지만 관직상의 현격한 격을 넘어선 한음의 오랜 벗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사제곡(莎堤曲)이 탄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제곡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것이면서 한음의 요청으로 지어진 국문 가사인데, 한음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리고 졸한 몸 영총(榮寵)이 이극(已極)하니/국궁진췌하여 죽어야 말려 여겨/숙야(夙夜)비해하여 밤을 잊고 사탁한들/관솔에 켠 불로 일월명을 도울는가/시위반식을 몇 이나 지내연고/늙고 병이 들어 해골을 빌리실새/한수동 땅으로 방수 심산하여/용진강 지내 올라 사제 안 돌아드니/제일강산이 임자 없이 바려나니/평생 몽상이 오래하여 그렇던지/수광 산색이 옛 낯을 다시 본 듯/무정한 산수도 유정하여 보이나니/백사정반에 낙하를 비끼 끼고/삼삼오오 섞이 노는 저 백구야/너 다려 말 묻자 놀래지 말라사라. (후략)”

한음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611년(광해군3) 봄에 지어진 이 작품은 단순한 서경 묘사를 넘어 임금을 그리는 정과 어버이를 받들고자 하는 지극한 효심을 담고 있다. 적절히 고사를 인용하고 경기체가가 지닌 멜로디를 조화롭게 장치해 오페라 아리아로 삼더라도 손색이 없을 듯한 작품이다.

종손을 만나보니 한음의 삶의 방식을 배워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종손은 단중(端重)했고 종부인 한양 조씨는 온자(溫慈)한 모습이었다. 종손은 미리 한음 선생의 영정각 문을 열고 그 앞에 초석자리를 깔아두고 있었다. 1992년 국역 발간한 한음선생 문고 2권 한 질과 종가 관련 자료 여러 점, 한음 친필 복제본 여러 장도 따로 준비해 두었다. 조상을 현양하기 위한 안내나 간단한 유인물은 받아보았지만 이렇게 자세한 자료를 준비한 경우는 드물었다.

더욱 감명 깊은 바는 ‘한음 종손 계보도’라는 두 장의 문건인데, 시조로부터 종손의 손자 영훈(泳勳, 2004년생)까지 26대의 계보를 정리해두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한음 자신이 이미 광주 이씨 ‘팔극가(八克家)’의 한 집인 이극균(李克均)의 5대 종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시우 씨는 선대인 이극균의 20대 종손이다. 종손의 선고 이세환(李世煥, 1915-1979)씨는 청주고보를 나와 청주, 수원, 의정부, 양주, 강경 등지에서 경찰서장을 역임했고, 퇴직 후 한음의 현양 사업과 종회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을 특히 존경했다고 한다.

종손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초등학교를 다녔고 강경중학교,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한국화약에 입사했다가 1972년 국방과학연구소가 창립되면서 차출되어 연구에 종사했다. 78년에 미국으로 출장간 후 80년에 귀국하려다 국내 정세가 요동치자 그대로 미국에 머물렀다. 18년 뒤인 98년에야 귀국했다.

“우리의 연구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실을 통해 직접 챙기던 것이었어요. 예산도 청와대 비서실 담당자가 직접 관장했죠. 월급도 당시 최고였던 삼성보다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장군들은 우리를 달가워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우리가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월급은 많이 받았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하지 말라고 한 사업이었어요. 그렇지만 박 대통령은 그대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미국에서 싫어하는 건 하지 말라고 해서 대부분의 과학자와 요원들이 그만두게 됐어요. 일부 기관에선 노학자를 불러 모욕도 주었고요. 저도 그래서 미국에 주저앉았습니다.”

말로만 떠돌던 프로젝트 연구의 중심에 있었던 이로부터 증언을 들은 셈이다.

한음의 문집을 읽다보니 임진왜란 와중에 무기 개발에 부심했던 장면이 있어 묘한 대비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애국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한음의 15대 종손이 맡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종손은 애국 과학자다. 종손이 근자에 하는 일은 한음 선생 배우기와 알리기다. 인터넷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관련 사진 자료와 글을 제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차종손 이승진(李丞鎭,1971년생) 씨는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로스쿨에 들어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미국에 있는 아들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시종 잔잔한 미소만 머금고 있던 종부가 가만히 거든다.

“열 살 때 미국으로 데려갔던 큰아이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저희 집이 좀 다르잖아요. 한국에 들어와 선을 보았는데, 정말 좋은 규수가 며느리로 들어왔어요. 서강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교편을 잡고 있었죠. 제사도 지내고 시부모를 잘 받들고 있어요.”

‘정말 좋은 규수가 들어왔어요’라는 표현은 사람 됨됨이가 된 규수를 며느리로 맞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며느리를 이렇게 소개하는 시어머니도 드물다는 생각에서, 오랫동안 감동의 여운을 남겼다. 어찌보면 그것이 한음 종가를 면면이 이어가게 한 힘일는지 모른다.

이덕형 1561년(명종16)-1613년(광해군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山人), 시호는 문익(文翼)

조선시대 최연소 대제학… 中·日 넘나든 외교戰으로 임란 극복

‘덕망과 문장을 갖추었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능력을 지녔던 인물, 당파에 기울어지지 않고 공명정대한 처사로 일관해 동서남북지인(東西南北之人)이란 평을 받았던 이가 한음 이덕형이다.’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 사계 김장생의 사계어록(沙溪語錄)에 나온 말이다.

조선 왕조 최연소 대제학, 3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빛나는 외교를 펼쳤던 인물이다. 그 밑바탕에 학문과 덕망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한음이 임진왜란 때 보여준 활약상 가운데 백미는 외교 분야다. 1592년 4월 13일 조선 선조25년, 일본의 장수 36명과 20만 왜적 주력군이 새까맣게 부산앞바다를 뒤덮었다. 한음은 이미 4년 전 일본 장수들이 부산에 와서 조선과 통상을 요구할 때 선위사 자격으로 그들과 협상을 벌인 경험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4월 29일에서야 서울에 도착한 조선 통역관이 그보다 하루 전인 4월 28일 충주에서 한음을 만나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이전의 만남에서 한음의 인품과 학문 그리고 문장에 모두 감복한 때문이었다. 한음은 학문과 위의(威儀)로써 저들을 감복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한음은 날짜가 지났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일념으로 단신으로 충주로 향했으나 이미 왜군은 용인을 함락한 뒤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왜군과 만난 한음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경응순을 보내 만나볼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기세가 오른 저들은 역관의 목을 베고 한음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만약 조선의 협상 대표로 한음이 유키나가와 담판을 벌였더라면 임진왜란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파죽지세로 내달리는 적을 막을 방도가 조선에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의주로 몽진한 조선의 입장이 얼마나 화급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많다. 그 가운데 백사 이항복이 쓴 서애 류성룡의 유사(遺事)가 있다.

한양을 버리고 떠나면서 대책을 세우는 장면이다. “주상께서 손으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롭게 차례대로 이름을 부르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각자 아무 거리낌 없이 모두 말해보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때 대신들은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주상께서 ‘승지의 견해는 어떠한가?’ 해서 즉시 내가 대답하기를, ‘의주로 몽진했다가 만약 그 형세가 궁해지고 힘이 다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되어 한 치의 땅도 남지 않게 되면 하는 수 없이 중국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주상께서 ‘공은 승지의 이 견해가 어떠하오?’ 라 하니 공께서는 ‘이는 옳지 않습니다. 주상께서 타신 수레가 우리나! 라 땅을 한 걸음이라도 떠난다면 이미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也)’라 하였다.” 여기서 승지는 오성 이항복이며, 공(公)은 서애 류성룡이다. 서애의 명분론과 오성의 상황론이 목적은 같으면서도 애처롭게 부딪치고 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이었다. 백사는 이내 돌아서서 자신의 평생 지기인 한음과 사태 수습에 나선다. 이때 내린 결론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것이며 백사는 이 일의 적임자로 한음을 추천했다.

이보다 먼저 적장 겐소(玄蘇) 등은 대동강에서 조선의 대표자와 만나 강화를 협상하자고 제의했고, 한음은 이에 응했다. 그러나 저들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왔으며 길을 내어달라고 강변해 한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협상이 결렬되었다. 다만 기세등등한 저들도 평소 한음을 존경한 때문인지 절하며 장수를 맞는 예를 갖추었다. 후일 이것이 빌미가 되어 왜적들이 한음을 추대해 조선의 국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명나라 감동시켜 원병 파견 관철

중국 명나라는 이때 조선과 일본이 간계를 써서 자신들을 협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후일 정응태라는 명나라 외교관이 이를 악용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달았고, 천신만고 끝에 한음이 사신으로 가 원만히 해결했다.

중국이 파병 결론을 내지 못하고 관망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6월 18일 한음을 청원사로 파견했다. 조선의 운명은 한음의 구원병 요청 결과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병조판서 직을 맡은 오성은 한음이 사신으로 떠나던 날 새벽 변방인 정주 고을 남문에서 통곡하며 작별했다.

이때 오성은 자신이 타던 말을 주면서 서로의 신후사(身後事, 자신이 죽은 후의 제반 일처리)를 부탁했다. 한음은 중국으로 가 비통한 마음으로 섬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범벅이 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간절하게 구원병을 요청했고 정연한 논리와 정성에 감동한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원병 파견을 결정했다. 우선 7월 중순에 조선의 조정을 호위할 별동군 선봉대를 보냈고 12월 25일 대장 이여송 휘하의 5만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왕은 한음을 접반사로 임명해 맞게 했다. 이로부터 명나라 군대 막사에서 침식을 함께하며 전략이나 군량 등을 챙기며 불철주야 노력했다.

한음은 공교롭게도 임란 도중에 모친상을 당했다. 3년상이 당시의 예였고 효심이 남달랐던 한음은 끊임없이 사임을 주청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병조판서 직을 맡아 조선의 병권을 쥔 책임자였다. 그때 선조가 한 유명한 어록이 있다.

“나는 왜적이 물러가지 않는 것보다 경이 조정에 없는 것이 더 큰 걱정이오. 경의 상소는 보는 이의 간장을 태우게 하지만 지금 나라 사정이 매우 어려운데 신하된 몸으로 어찌 사사로운 예절만을 고집하면서 나라를 외면한단 말이오. 만약 나라가 잘못되면 어찌 경인들 자식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소. 경의 모친이 혼백이 있어 이러한 사정을 안다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경의 등을 밀어 조정으로 가라 할 것이요.

개인적인 정을 억누르고 국가를 생각하여 즉시 상경하여 판서의 직을 성실히 수행하시오.” 논리에 꺾인 그는 즉시 상경하여 그 직을 맡았다. 그때 올린 상소가 유명한 시무팔조(時務八條)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나라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습 방안이다.

대부분이 전쟁 중에 일실되어 일부만 수습해 한음문고에 실려있지만 그 분량은 적지 않다. 그래서 전문을 정독하기란 여의치 못해 가려서 읽을 생각으로 뒤적이던 중 그 글에 눈이 멈추었다. 시사성까지 갖춰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정독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글이다. 원문을 이해해 읽는다면 명문장이 가슴에 닿아 상쾌함도 느낄 것이다.

救國功臣의 삶 실천

독립기념관 야외에 오성 이항복의 비와 나란히 선 한음의 구국공신(救國功臣) 어록비(語錄碑)에 이 시무책 한 토막이 번역되어 있다.

“임금의 한 생각에 나라의 치란이 판가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지극히 두려운 것이 백성의 마음인 것입니다. 공평하고 인자한 정사를 펴 민심을 수습하셔야 할 것이며 새로운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는 무예를 조련시켜 전 장병을 정병으로 양성하여 외침에 대비해야 하며, 지형의 요해한 곳을 살펴 방어진을 설치하여 영원한 자주국방의 대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이 문장보국(文章輔國)인지 모0渼? “경의 헌책을 보니 참으로 남다른 지혜가 있소. 비변사에 내려 의논해 처리하게 하겠다.” 국왕 선조의 결재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공사(朝鮮公事) 삼일(三日)’ 즉 조선의 조정 일이라는 것은 3일 정도 지속되다 바뀐다는 말이 있듯 이 헌책 역시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나라를 풍전등화에서 구했던 대신은 선조의 의심까지 받았다.

광해군 당시에는 당파를 일삼는 이들에게 몰리고 국왕의 오해에 휘말려 한음은 53세 되던 1613년(광해군5) 9월에 삭탈관직을 당한 뒤 10월 9일 세상을 뜨고 만다. 죽기 1년 전인 광해군4년에 익사(翼社)와 형난(亨難)이라는 두 공신에 책록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에게 받은 작위는 삭탈되었다.

여기서 생각할 점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에게 유독 공신 책록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나마 뒤늦게 받은 두 공신은 공교롭게도 자신 역시 피해를 당했던 광해군 조정에서 받은 것이라는 이유로 추탈되고 말았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신록에서 삭제된 것 때문에 부조지전을 시행하지 못하다가 1759년(영조35) 4대 봉사가 끝나 더 이상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긴 국왕의 특명으로 인해 불천위로 모심과 아울러 사패지를 함께 받았다. 한음의 후손 중 모두 10명이 문과에 급제했고 7대손인 이기양(李基讓)은 성리학자이면서도 북경에서 천주학을 배워 이를 후학에게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 이총억(李寵億)이 천주교의 성인(聖人)에 서품되었다.

9대손 이의익(李宜翼)은 이조판서로 기로소에 들었고, 10대손 이병교(李炳敎)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1669년에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는 근암서원(近書院), 1692년에는 경기도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각각 배향되어 춘추로 향사를 모신다.



입력시간 : 2007/01/0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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