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명기 성룡 뺨치는 전혀 새로운 본드가 떴다

시리즈 영화의 생명력은 일신우일신하는 변화의 의지에서 나온다. 스물한 번째 007영화 <007 카지노 로얄>(이하 <카지노 로얄>)은 이 성공적인 장수 시리즈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인' 제임스 본드가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들에 맞서 펼치는 활약과 관능적인 본드 걸과의 로맨스, 아슬아슬 곤경을 헤쳐가는 제임스 본드의 곡예가 장장 2시간20분의 러닝타임 속에 펼쳐진다.

킬링타임용 팝콘 무비치고는 만만찮은 러닝타임이지만 시간이 어떻게 지나버렸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긴장과 밀도를 유지하는 솜씨가 출중하다.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어 영국 출신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를 6번째 제임스 본드로 기용하고, 17번째 007 시리즈 <골든 아이>를 연출했던 마틴 캠벨 감독을 중용한 <카지노 로얄>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한 제작자 바바라 브로콜리의 선언을 실천에 옮겼다.

원작자 이안 플레밍이 너무 중히 여긴 나머지 <007>의 영화화 판권을 넘길 때 몰래 감춰뒀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만큼 촘촘한 드라마 구성과 풍성한 볼거리가 최고의 오락을 선사한다.

드라마와 스펙터클의 앙상블

영화는 냉전이 종식되고 '테러'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현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테러리스트 조직을 추적하던

중 국제 테러 조직에 자금을 대는 르 쉬프르(매즈 미켈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르 쉬프르가 몬테네그로의 카지노 카지노 로얄에서 거액의 포커판을 벌인다는 계획을 접수한 본드는 상관 M(주디 덴치)으로부터 판돈을 지원받아 위장 잠입한다. 그를 지원하기 위해 미모의 여성 요원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가 급파되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서로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테러리스트에게 흘러들 수 있는 거액의 판돈이 걸린 도박판에서 르 쉬프르와 진땀나는 한판 승부를 벌이는 본드는 극적으로 쉬프르의 계획을 저지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음모에 휘말린다.

<007 카지노 로얄>은 1953년 출간된 원작자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첫 번째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답게 비밀요원으로서 본드의 탄생과 전통적인 007 시리즈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요부형 미녀와 로맨스에 빠지는 본드와 음산한 매력의 악당들과 벌이는 고난도 액션신이 140여 분간 마음을 조리게 만든다.

007 시리즈의 원류에 충실하게 만들 것을 목표로 삼은 마틴 캠벨 감독은 제임스 본드가 노련하고 약삭빠른 비밀첩보원이 되기 전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까닭에 007 시리즈의 서명과 같은 첨단 기계 장치와 기발한 신무기의 활약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를 대신한 건 첨단 시대에 재림한 '아날로그 액션'의 진기명기다. 빌딩 숲 사이을 누비는 극한의 익스트림 스포츠 '야마카시'를 옮겨 온 듯한 오프닝 추격 신은 성룡의 기예적 액션을 연상시키고 육박전과 총기 액션, 자동차 추격전까지 다양한 종류의 액션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액션 외에도 몬테카를로의 호화판 카지노 '카지노 로얄'에서 벌어지는 도박 장면은 진땀나는 승부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체코 프라하와 바하마, 마이애미, 이탈리아, 영국을 잇는 다국적 로케이션은 수려한 풍광을 보장하고 한 번도 허용되지 않았던 베니스 운하 촬영까지 볼거리와 즐길거리에 있어서는 이전 시리즈들을 압도한다.

'크레이그는 최고의 본드' 評

무엇보다 신세기 제임스 본드로 간택된 벽안의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는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본래 캐릭터를 상실해가는 본드의 매력을 십분 되살려낸다. 본드 걸로 출연한 신성 에바 그린의 매력도 만만치 않지만 크레이그는 새 시리즈를 완전히 제임스 본드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었다. 캐스팅 당시 기존 제임스 본드와 너무도 다른 빈한한 이미지 때문에 많은 팬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었으나 영화가 공개된 직후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는 찬사를 받았다. 난이도 높은 액션 장면은 물론 제임스 본드가 지닌 다중적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한 크레이그는 <카지노 로얄>의 기록적인 성공을 견인한 일등공신이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전 본드와 확실히 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뮌헨>, <레이어 케이크> 등의 영화에서 검증된 연기력을 보여준 크레이그는 그만의 본드를 창조해냈다. 무엇보다 크레이그는 '고생하는 본드'를 연기한다. 크레이그의 좌충우돌은 자신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룡이나 <다이하드> 시리즈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맥클레인 형사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철저하게 임무를 완수하는 첩보원으로서의 능력은 대동소이하지만 귀족적이고 뺀질거렸던 이전 본드들에 비해 그는 친근함이 느껴지는 '블루 컬러 007'을 연기한다. 살이 찢기고,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남자들의 중요한 부위가 집중 고문당하는가 하면, 독극물을 마시고 송장이 될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

허점이 없는 완벽한 남자의 이미지보다 고통받고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흔들리기도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미국 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크레이그가 연기한 얼굴에 상처 가득한 007은 상처 입은 현대 남성의 모습을 상기시킨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새로운 007 시리즈의 출발을 예감케하는 이 잘 빠진 오락영화가 반가운 것은 당분간 007 팬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멋드러진 제임스 본드가 탄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