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과 독신자의 역사’라는 원제가 달린 이 책은 프랑스의 지적 전통에 어울리는 저작이다.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두고 있는 이 나라는 역사 부문에 있어서도 아날학파의 전통, 즉 정치 권력·연대기 일변의 역사 서술 방식에 다채로운 사회·문화적 관점을 도입한 저력을 지닌 나라다. 문헌학자이자 도상학자인 저자는, 비록 그 사료(史料)를 자국 것 위주로 인용했다곤 하지만, 폭넓은 관심사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류 역사와 고스란히 겹치는 독신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고대·중세·근대·현대로 뭉텅이 지어 각 시대마다 독신자의 지위와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형성됐는가를 면밀히 살핀다. 성직자와 같은 몇몇 예외가 상존하지만 독신이 겪은 유구한 세월은 책의 번역 제목처럼 ‘수난사’라 칭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싶다. 18세기 말 이전은 특히 그렇다.

고대 페르시아에선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내세로 가는) 다리가 끊긴 자’라 폄훼했고, 이스라엘에선 그야말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다(“독신자는 인간이 아니며 살인과 같은 중죄를 저지른 자다”). 한술 더 떠 로마의 현제(賢帝) 아우구스투스는 ‘부도덕하고 불경한’ 이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매기고 상속권까지 박탈했다.

시대를 훌쩍 건너왔건만 17, 18세기에도 국가는 여전히 매몰차게 독신자를 다그친다. 이 시기 근대 국가의 꼴을 단단히 갖춘 유럽은 국경 너머 영토를 탐하는 제국주의적 욕망을 서서히 드러낸다. ‘머릿수’가 국력과 민감하게 연결되는 이런 상황에서 혼인과 출산을 꺼리는 독신자는 조국에 해가 되는 이기주의자로 낙인 찍힌다. 통일과 함께 부쩍 강성해진 이웃 프로이센이 부담스러운 프랑스의 경우, 노총각을 우선적으로 징집하거나 불륜을 부추기는 작가(대표적인 예가 소설 <마담 보바리>를 쓴 보들레르)를 고소하는 방식으로 ‘결혼 요새’ 강화에 골몰했다.

독신 수난의 노정에서 여성은 훨씬 큰 고통을 겪었다. 고대·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의 문턱에 들어설 때까지도 ‘처녀 상한선’ 25세를 넘긴 독신 여성들은 싸잡아 음탕하고 부도덕한 존재로 취급됐다.

이런 사회적 편견과 압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17세기 중엽 독신주의 선구자 가브리엘 쉬숑은 죽을 때까지 철저한 금욕의 길을 걸으며 ‘상식’을 거스른 부채감을 덜었다. 19세기 의학은 과학적 진리를 빙자하며 독신 여성 공격의 선봉에 섰는데 동원된 논리가 설익다 못해 황당한 수준이다. 한가지만 인용해 보자. “노처녀가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발정기의 행동 같은 것이다.”

몰이해와 박해로 점철된 독신자의 역사가 유턴 기회를 잡은 건 걱정 많은 영국 목사의 저작 덕택이었다. 1798년 맬서스는 오늘날 읽어도 제법 섬?한 고전 <인구론>에서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인구가 결국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것이라 경고한다. 종교적 의무 때문에 피임을 권할 수 없었던 그는 가급적 결혼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며 본의 아니게 싱글들의 뒤를 봐주게 된다. 혁명적 인식 전환에 뒤따른 상황도 독신자에게 유리했다. 전쟁 미망인에 대한 존경, 가전 제품의 발달, 탈종교·탈권위적 문화 형성, 만연해진 동거, 독신자를 겨냥한 마케팅 등장….

맬서스로부터 2세기 가량 흐른 지금, 저자는 독신자를 대상으로 빈번하게 행해지는 커플맺기 프로그램에 주목한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동반자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선남선녀들은 짧은 만남과 헤어짐을 쉴새없이 반복한다. 잠시도 혼자이지 않은 독신을 독신이라 불러도 좋을까. 유구한 수난사를 무색케 하는 ‘독신 만세’ 시대에 저자는 관계맺기 방식의 커다란 전환을 예감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혼을 비웃는 솔로에게조차 솔메이트(soul mate)와 조우를 바라는 마음이 끈질기게 남아 있음을 새삼 확인하며 저자는 마냥 유쾌해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