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 인간

‘명화를 감상한다’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그림을 본다’라는 말을 써 보자. 도대체 ‘그림을 본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일일까. 그것은 ‘책을 읽는다’나 ‘음악을 듣는다’나 ‘자연을 느낀다’와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 일일까.

우선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보고, 읽고, 듣고, 느낀다는 것에는 ‘무엇을’이라는 목적어 외에도, ‘누가’라는 주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여 그 행위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어쩌면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유럽으로 그림을 보러 간다고? 그림은 봐서 뭣 하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나한테는 꼭 필요하다.”

그림 감상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얼버무리듯 애매한 대답을 하고 만 어느 감상자의 경우는 어떨까.

서경식(1951- )은 남다른 그림 감상자다. 그는 화가도 아니고 미술이론 전공자도 아니다. 평론가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 감상에 매달린 것도 아니다. 그는 일본 교토 출신의 재일조선인이다.

그의 이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의 형제들이다. 1971년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서울에 유학중이던 서경식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은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그들은 정치범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감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일본에 있던 동생 서경식과 다른 가족들의 삶 역시 감옥에 갇혀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형들처럼 고국으로 건너가 훗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청년 서경식의 꿈은 감당하기 힘든 절망 속에서 일그러지고 뒤틀려버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나한테는 꼭 필요하다’라는 대답을 남기고 그림을 보기 위해 처음 유럽 여행길에 오른 것은 서경식의 나이 서른둘, 그의 형들이 감옥에 갇힌 지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나는 지하실에 처넣어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지하실은 어둡고 눅눅하고, 게다가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간다. 사방이 꽉 막힌 이 상황이 처음에는 2-3년쯤 갈 것으로 예상했는데,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끝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절망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서경식은 유럽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보았다. 그 감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과연 그 행위의 ‘주어’인 그 자신에 의해 결정되었다.

“나에게 예술은 그 숨 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은 창문은 벽 높은 곳에 있어서 바깥 경치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색깔 변화와 공기가 흐르는 기미는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닿지 않고, 창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지만, 그 작은 창문 덕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청춘의 사신>은 서경식의 두 번째 미술평론집으로 20세기 현대 회화들을 텍스트로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책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그가 다룬 작품들은 주로 중세와 근대 이전의 작품들이었다. 서경식이 두 책을 내는 사이 20세기가 막바지에 다다랐고, 그의 두 형들은 20여 년의 감옥 생활 끝에 결국 석방되었다. 서경식은 <청춘의 사신>에서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운명이 비롯된 20세기라는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미술작품을 통해 고찰하고 있다. 책의 부제는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이다.

그는 20세기를 ‘세계대전, 대량학살, 그리고 난민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20세기가 이룩한 엄청난 부의 축적과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발달, 그리고 새롭게 대두된 이데올로기들은 분명 진보와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고통과 절망을 그 대가로 치러야만 했음을 알고 있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도 인류는 여전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청춘의 사신>은 우리에게 분명히 일깨워준다. 피카소, 뭉크, 클림트, 콜비츠, 클레 같은 화가들이 얼마나 힘겹게 시대의 광기와 맞섰는가를, 그들이 캔버스 위에서 얼마나 치열한 사투를 벌였는가를. 우리는 알게 된다. 키르히너, 코코슈카, 코린트, 실레, 샨 같은 화가들이 예술가의 예민함으로 우리에게 끝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부조리한 시대와 부대끼며 그들이 ‘더 많이 느끼는 자’로 감당해야 했던 지독한 고통을...... 그들의 작품은 20세기의 악몽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고, 깊은 통찰력을 가진 눈 밝은 감상자 서경식은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알아보고 있다.

“나는 지금 커다란 지옥도를 그리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죽음과 광기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리. 왼쪽에서는 관 위에 올라탄 죽음의 화신이 길을 가로지르고, 오른쪽에서는 남자가 젊음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캔버스 위에 토해내고 있다. 파괴로 치닫고 있는 시대,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독일 화가 조지 그로스의 말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자신이 독일인이란 사실에 절망한 화가는 게오르그(Georg)라는 독일어식 이름을 영어식인 조지(George)로 바꾸어버린다. <청춘의 사신>에는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독일 화가들이 여럿 등장한다. 오토 딕스, 에밀 놀데, 로비스 코린트,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같은 화가들은 나치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은 압수된 뒤 ‘퇴폐미술전’에 전시되어 조롱거리가 되었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은 종전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청춘의 사신>에는 그 밖에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일본의 화가들과 시대의 양심이 되지 못하고 예술가로서의 신의를 저버린 화가들도 등장한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서경식이 고민했듯,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의 의미를 화가들 역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다시 한번 조지 그로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진실주의자는 동시대인들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인다. 내가 유화나 판화를 제작한 것은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다. 내 작업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추악하고 병들었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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