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눈과 얼음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

어린 시절, 새 학기를 앞두고 새 교과서를 받으면 그중 ‘사회과부도’를 펼쳐놓고 공상에 빠지길 유난히 좋아했다. 한참이나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며 멀고 먼 곳, 내가 가보지 못한 장소의 낯설고 이국적인 이름을 발음해 보던 일. 그곳의 기후와 풍경,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삶을 상상하는 일은 그곳이 단지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때 지도의 어느 귀퉁이에서 찾아냈던 ‘그린란드’를 기억한다. ‘Green land’라는 이름과 달리 그곳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땅덩어리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린란드라는 이름 옆에는 ‘(덴)’이라는 글자가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그린란드는 어떻게 덴마크의 땅이 되었을까. 지도 위 태평양이나 대서양의 몇몇 작은 섬에서도 그런 표시들을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미), (영), (프)라는 글자였다.

나는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그린란드를 상상했다. 북극에 가까운, 더없이 드넓고 고요한, 너무도 춥고 황량한, 덴마크 사람들은 그곳에 참으로 역설적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회과부도의 책장을 넘기며 공상에 잠기던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덴마크에도 그린란드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덴마크와 그린란드는 내게 있어 그 시절보다 훨씬 각별한 곳이 되어 있다. 페터 회(1957- )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그런 것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무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그러나 무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야릇하고 기묘한 기분. 특별하고 매력적인 힘을 가진 소설은 그 배경이 되는 공간과 도시를 (우리가 직접 가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잊을 수 없는 곳으로 만든다. 복잡한 뉴욕의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왠지 폴 오스터 소설의 주인공들을 가려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우리는 제임스 조이스를 빼놓고 더블린을 얘기할 수 없고, 프란츠 카프카가 없는 프라하를 상상할 수 없다.

스밀라 야스페르센. 그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눈의 황무지인 그린란드를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박하차를 마실 시간이다. 도시를 내려다볼 시간. 나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지 모른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다시 등을 돌렸을 때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싶은 여자. 스밀라는 특별하다. 그린란드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린 시절을 그린란드에서 보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 그녀는 추위와 고독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녀와 함께 극지방 연구에 참가했던 연구원들은 보고서에 “얼음에 대해, 눈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 스밀라 야스페르센에게 문의할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녀는 경계의 삶과 운명을 산다. 때로는 거칠게 저항하며, 때로는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속에는 야생 이누이트인과 서구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는 야생의 방식과 문명의 방식 모두를 알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밀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심지어 증오조차도 자연적 목표물 위로 풀려났을 때는 따뜻해진다.”

“최악의 것은 분노가 아니다. 최악의 것은 분노 뒤에 있는 욕망이다. 순수한 감정으로 사는 것은 가능하다. 진정으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나의 비밀스러운 갈망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면, 기다리면서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림은 파괴적으로 변한다. 사물들이 미끄러지게 놓아두면, 의식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공포와 불안을 깨운다. 우울이 닥쳐오고 자멸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린아이였던 시절 이래로 그랬던 것보다 훨씬,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단지 환상이라는 사실이 더 명확해졌다. 인생은 우리가 한 번도 해결하지 못했던, 쓰디쓰고 본의 아니게 우스꽝스러우며 반복적인 갈등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도.”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말은 어떤 일이 되었건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 외에 우리에게 있는 게 뭐란 말인가?”

코펜하겐, 눈과 얼음의 나날. 스밀라는 이웃의 한 소년, 자신처럼 몸속에 이누이트의 피가 흐르는 어린 이사야를 사랑하게 된다. 자연사박물관에서 그들은 함께 4만 년 전 살았던 물개와 들소에 대해 얘기한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 가죽을 가져도 돼?” / “좋아.”

둘은 마음 깊이 서로의 영혼을 느낀다. 둘은 눈과 얼음을 통해 인간과 우주를 꿰뚫어볼 수 있음을 믿는다. 그렇기에 스밀라는 눈 쌓인 지붕 위에서 추락사한 이사야의 죽음에 어둡고 부조리한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직감한다. 눈은 더렵혀졌다. 하지만 다시 얼음처럼 냉정해져야 한다. 이사야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스밀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하여 이 소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독특한 추리소설 중의 한 편이 된다.

다시 어린 시절처럼 그린란드의 지도를 들여다본다. 지도 위에 눈과 얼음이 쌓여 있는 것만 같다. 스밀라가 가진 감각을 빌려 나는 그린란드를 느껴본다.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이 소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무더웠던 여름날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창밖에는 차가운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다. 그 사이에 내겐, 스밀라에게처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처럼, 소설처럼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결론? 눈이 내리고 내린 눈은 서울에서는 녹아 사라지고, 그린란드에서는 녹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말해 줘’라고 사람들은 내게 와서 말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고 끝맺을 수 있잖아’라고.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가 이신조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