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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34] 眞城李氏 退溪 李滉(진성 이씨 퇴계 이황)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씨, '善人' 길러낸 한국 종가·종손 표상… 100세 앞둔 종손, 한시 술술 암송
학처럼 온화한 자태 여전… "종가가 할 일은 가문의 화합 이루는 것"









우리나라 역사 인물 가운데 퇴계 이황 선생만큼 복록(福祿)이 좋은 이가 또 있을까? 자손이 번성하고, 종통이 면면히 계승되었으며, 최고의 학자로 생전과 사후에 변함없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인생삼락(人生三樂)에 인재를 모아 교육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퇴계 선생만큼 많은 제자와 훌륭한 인재를 문하에 거느린 예가 없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에서는 이례적으로 공적조서조차 꾸미지 않고 영의정에 추증함과 아울러 즉시 시호를 내려 그 공을 기렸고, 역대 조정에서는 예관(禮官)을 파견해 제사를 모셨다.

제자 명단인 <도산급문제현록>이라는 책을 보면 삼정승을 비롯 당대를 대표한 학자는 물론이요 정치가, 문장가 368인이 기라성처럼 올라 있다. 이들은 직접 지도를 받은 이다. 후대에 선생을 따라 배운 이들도 많다. 이를 사숙제자(私淑弟子)라 하는데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 대표적 人물이다.

이들을 통해 퇴계학은 실학(實學)에도 영향을 끼쳤다. 다리를 놓은 이가 한강 정구와 미수 허목이다. 성호는 퇴계를 존모하여 퇴계에 대해 최고의 존칭인 ‘이자(李子)’를 헌정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존칭 자(子)를 붙인 사례는 퇴계 선생을 위시해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안자(安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송자(宋子)로 부른 외에는 없는 듯하다.

퇴계 선생은 당대에 선비들로부터 최고의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로는 국왕들로부터도 더없는 의지의 대상이었다. 명종 즉위년에 퇴계가 올린 상소에는 마치 임진왜란을 예견해 처방한 듯 완벽한 일본 대비책이 들어 있다. 어린 선조에게는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통해 국정 지침을 올렸고, 평생 해야 할 공부를 열 장의 그림으로 풀어서 알려주었다.

묘소
당시 홍문관 전한이던 퇴계는 일본과의 ‘유연한 외교’를 주문해 화친책을 택하면서도 최고의 경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만한 자식은 애미를 욕한다(驕子罵母)’라는 속담을 예로 들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은 비유하자면 자식의 탓이면서 동시에 부모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예까지 들었다. 일본을 교만한 자식에, 우리나라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이다.

정조는 퇴계 선생의 최고 팬으로, 심지어 제자의 예까지 갖추었다. 정조는 당시 천주학의 폐해가 유독 경상도 지역만 생기지 않은 것이 퇴계와 회재 이언적의 공이라고 여겨, 이례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사당에 제사함과 아울러 사림 진작을 위해 안동에서 최고의 국가고시를 시행하기까지 했다.

퇴계학 연구원이 중심축

선생을 존모하는 행렬은 오늘로 이어져,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자 결성된 여러 단체가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축은 역시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원장 이우성)이다. 퇴계학연구원은 선생의 15대손이자 인천제철(현 INI스틸)의 창업자인 고 이동준 박사가 1970년 설립해 반석에 올렸다. 이 박사가 염원한 대로 이제 일본을 비롯해 독일, 영국, 미국, 중국 등에서 퇴계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학자가 다수 생겼고 지회도 결성됐으며 국제학술대회까지 수차례 열렸다.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퇴계학을 연구하는 나라는 일본과 중국이다.

종손 이동은 씨
두 번째 축은 (사)박약회(博約會, 회장 李龍兌)이다. 박약회는 고 김호길 박사, 고 권오봉 교수, 고 이동준 박사의 막내 동생인 이동승 서울대 명예교수(퇴계학연구원 이사) 등에 의해 80년대 후반에 설립한 단체로, 선현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자는 취지로 만들었다. 당초 10여 명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23개 지회에 4,000여 회원이 활동하는 유림 단체로 성장했다. 박약회 이름은 퇴계를 배향한 도산서원 동쪽방(博約齋)에서 따왔다.

또 하나의 축은 퇴계의 제자 후손들의 모임인 ‘도운회(陶雲會)’가 있다. 퇴계를 배우고 실천하는 직할 모임이다. 회원들의 유대와 응집력이 문도(門徒)와 세의(世誼), 혼맥(婚脈)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단체보다 강한 편이다.

삭풍이 매섭던 겨울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 퇴계 선생 종가 본채 사랑방에서 종손을 다시 만났다. 종부 김태남(金太南) 여사와, 맏자부 정정희(鄭貞姬) 여사는 이미 세상을 버렸다. 현재의 퇴계 종택은 일제의 방화로 1907년 불타 없어진 것을 22년 뒤에 문중인사와 전국 유림들의 찬조로 재건했다. 퇴계 선생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1909년 생) 옹은 1세기를 살고 계시는 ‘융로(隆老, 78세 이상의 연세가 많은 어른)’다. 종손은 지난해 폐질환으로 크게 고생한 일이 있는데,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반가웠다. 그래서 요즘 특별히 즐거운 일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 괴로운 세상이야, 고해(苦海)지. 성(姓)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계통(系統)을 바로잡고 살 수도 없으니, 짐승만도 못한 세상이지. 문명(文明)이라고 하는데, 나쁜 개명(開明)을 한 게지.

TV를 보니 부모를 집에 10여 일간 방치해 죽인 자식을 10개월 징역에 처했다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땅에 떨어진 나라야. ‘사유부진(四維不振)이면 국내망(國乃亡)이라’는 성현의 말씀이 있어.” ‘사유(四維)’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네 가지 덕목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져야 하는 규범이다. 대학 1학년 때 안동의 화교소학교 담에 적힌 큼직한 글씨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대륙을 빼앗긴 화교들이 이국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예의염치’를 교육했던 것이다.

필자가 종손을 처음 본 지 30년이 넘었다. 학 같은 온화한 자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종손은 타고난 근력과 월등한 기억력을 가진 어른이다. 옛글을 낭송하는 성음(聲音)도 일품이다.

“내 ‘글 사장(師長)’은 이웃에 있던 일가 어른이었고,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역시 일가 어른께 3년 동안 통감(通鑑) 6권과 사서(四書)를 배우고 11세 때 남보다 늦게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 후로는 옥편을 놓고 혼자 배웠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퇴계 선생의 초년 공부가 떠올랐다. 퇴계 선생은 이웃 어른에게 천자문을 배운 뒤 12세 때 넷째 형 온계(溫溪) 이해(李瀣)와 함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그리고 19세 때에는 성리대전(性理大全) 수미(首尾) 두 권(첫째권이 太極圖說이요, 마지막권이 詩이다)을 얻어 읽었다.

종손은 시에 특장이 있다고 한다.

“나는 한시를 보면 재미 있고, 외우면 신났지. 한번은 안동 김시탁 씨 집에 찾아가니 병풍에 시가 쓰여 있었는데 한눈에 들어왔어.

‘추도광릉상(追到廣陵上)
선주이묘명(仙舟已杳冥)
추풍만강사(秋風滿江思)
사일독등정(斜日獨登亭)’
(‘뒤늦게 광나루로 달려갔더니
선생님 배는 이미 눈에서 아득해
가을바람 스산한 강가에서 님이 하 그리워
저물녘에 나 홀로 정자에 올랐네)

내가 볼 때 썩 잘 지은 시라 필시 이는 당시(唐詩)다 싶어 안동 출신의 한문학 대가인 연민(淵民, 故 이가원 박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게 아닐세. 좌의정한 양반인데, 서애(西厓, 柳成龍)하고는 안 좋았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란 이의 시일세’라 하대.”

종손은 한 자의 착오도 없이 시를 외웠다. 100세를 바라보는 종손의 기억력은 타고난 것임을 실감했다. 송강은 가사문학의 대가다. 그의 학문 원류를 살펴보면 퇴계에게 맥이 닿아 있다. 그의 스승인 하서 김인후는 퇴계의 지기(知己)요, 고봉 기대승은 퇴계의 고제(高弟)며, 송강 역시 퇴계를 존경해 그 같은 이별의 시를 지어 바쳤던 것이다. 선조 즉위년인 1567년 8월에 지은 작품이다.

종가에서 종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목족(睦族)이지.”

가문의 질서를 잡으면서 지손(支孫)들에게 두루 평안하게 할 것을 생각하신 것 같다.

“봉제사 접빈객이 제일이지. 무엇보다 일족(一族)을 화합하는 일이 우선이지.”

종가와 종손의 표상이라고 생각하는 퇴계 종가에 와서 종손에게 직접 들은 종손의 책무 역시 특별히 다른 것은 없다. 결국 종가의 성패는 그 기본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려있는 셈이다.

인터뷰 내내 차종손 이근필 교장선생님이 자리를 지켰다. 언제 봐도 온화한 어른이다. 그런데, 시대의 풍기(風氣)에 논의가 이르자 단호한 어조로 개탄한다. 그 대안으로 궁리한 게 퇴계 선생이 꿈꾸었던 ‘선인(善人) 만들기’이다. (사)도산서원 부설 선비문화수련원(원장 鄭灌, 전 대구교육대학 총장)은 아마도 교장선생님의 필생 후원 사업이 아닌가 한다. 퇴계 선생은 평생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 소원은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를 말씀했다. 종손 부자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적막한 종가에서 오늘도 부심하고 있는 듯하다.




이황 1501년(연산군7)-1570년(선조3)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벼슬보다 수양과 후진양성 힘쓴 '百世의 師表'

조광조의 도학정치가 현실에서 실패하는 것을 목도했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관학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퇴계 선생은 관학적 아카데미즘의 전통에서 눈을 돌려 서원창설운동을 통해 사림 부흥을 꿈꾸었다. 소수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제도를 정비했고, 이산서원을 창설했다. 그리고 도산서당을 만들어 도산아카데미를 연 후 이곳을 주리론(主理論) 본원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 서원의 병폐가 드러나기는 했지만 선생이 꿈꾼 서원은 선비들을 모아 참다운 공부를 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었다. 필자는 이 점이 퇴계가 우리 문화에 끼친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퇴계 선생의 삶은 누구보다 참담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를 학문과 수양으로 극복해 마침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었다. 선생은 생후 6개 월 만에 부친을 여의었고, 두 번의 상처(喪妻)와 아들을 앞세웠으며, 사화(士禍)로 형님의 비명횡사를 목도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단양군수, 대사성, 첨지중추부사, 공조판서, 대제학(66세), 예조판서(67세)를 거쳐 우찬성(69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살이보다는 수양과 후진양성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문집은 수십 차에 달하는 사직 상소문으로 넘쳐난다. 퇴계 선생이 정승에 이르지 못한 것은, 당시 조정에 선생의 사직 논리를 명쾌하게 꺾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명망 있는 신하의 진퇴는 일종의 명분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1,000원권 지폐 인물로 널리 알려진 덕분에 거개가 선생에 대해 얼마간은 안다고 생각한다. 퇴계 선생은 어떤 인물일까? 이럴 때 필자는 조선 왕조의 졸기 끝 구절과 퇴계 자신이 지은 묘갈명 명문(銘文)을 떠올린다.

졸기에는 "논자들에 의하면 이황은 이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1482-1519)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으니, 이황이 재주나 기국(器局)에 있어서는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義理)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라고 썼다.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조광조 역시 도학(道學) 적전(嫡傳)을 계승 유종(儒宗)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퇴계 선생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손수 행장(行狀)을 지어 기렸다. 다만 조광조가 품었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출하기도 했다. '의리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한 경지에 이른 것'은 연구하는 학자의 자세다. 실제로 선생은 기묘사화로 꺾인 유림 사회를 진작했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마침내 주자학을 집대성했다. 이 연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기라성 같은 퇴계 문학의 학자군(學者群)의 도움이 지대했다.

다음은 손수 지은 자신의 묘갈명을 통해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퇴계 종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지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선생의 묘소는 오르기에 다소 힘겹다. 의아한 것은 묘소 가는 길에서 신도비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침내 묘소에 당도하면 고아한 품격으로 참배객을 맞이하는 아담한 묘소 봉분과 묘갈(墓碣), 그리고 석인, 동자석과 만나게 된다. 갓이 없는 아담한 묘갈에는 명문장에 명필(선생의 제자로 宣城三筆의 한사람인 琴輔)로 비문이 쓰여 있는데, 전면에 대자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적었다. 돌아가신 직후 선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비문 전면에 행직인 판서보다 높은 찬성(贊成)과 증직인 의정부 영의정을 길게 적어야 함에도, 선생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엄히 유언했고 이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전면 대자 왼편에 다소 어려운 글자와 함축미를 느낄 수 있는 문자로 선생의 일생을 담담하게 응축(凝縮)한 글이 보인다.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원문 생략).

태어나선 몹시도 어리석었고

장성해선 몸에 병도 많았다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고

늙어서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나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만 갔고

벼슬은 사양해도 자꾸 내렸지

관직에 나아가선 차질 있었고

그래서 물러나 은거할 뜻 더욱 굳었네

나라 은혜엔 정말 부끄러웠고

성인 말씀엔 참으로 두려웠었네

산 있어 높이도 솟아 있고

물 있어 끊임없이 흘러가는 걸

벼슬하기 전으로 내 돌아가니

뭇사람들 비방도 줄어들었네

나의 회포 여기서 막히었으니

내 패옥을 누가 알아주리오

옛사람 모습 떠올려보니

참으로 내 마음 알아주셨네

이제 저세상에서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근심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운 중에도 걱정이 있네

조화를 따라 이제 사라짐이여

내 다시 그 무엇을 구하랴?

네 글자 24구로 총 96글자는 음미할 수 있는 격조 있는 글이기도 하다. '우중유락(憂中有樂)/낙중유우(樂中有憂)'는 이미 신선세계에서 노니는 듯한 분위기다. 선생의 묘갈명은 특이하게도 스승과 제자의 합작인 셈이다. 생전에 총애했던 고봉 기대승이 자찬묘갈명 아래에 비교적 짧게 묘갈명을 적었다. 이는 선생이 극구 실정과 다른 과장을 금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스승의 분부가 엄해도 고봉 역시 실상과 달리 축소할 수는 없었다. 간결하지만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묘갈명 내용 중에 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 고봉이 직접 지은 글 내용이다.

묘갈명 고봉 기대승이 적어

선생께서 병이 위중해지자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법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라고 청할 것이다. 너는 반드시 나의 유언이라고 해서 상소하여 굳게 사양하여라. 또 비석은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쓰고 세계(世系)와 행실을 뒤에다 간략히 적어 가례(家禮)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야 한다.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 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 고봉(奇高峯, 奇大升)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 미리 명문(銘文)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루어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속에 보관해두었으니 이것을 찾아서 써야 한다"라고 자세히 일러두었다.

결과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예시까지 한 기 고봉이 묘갈명을 맡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선생의 뜻이 도리어 그에게 두어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유명(幽冥)을 달리할 즈음에 참으로 은미(隱微)한 당부를 멋있게 남긴 셈이다. 계문(溪門)의 고제인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도 이를 추인했음은 불문가지다.

다음호엔 순흥 안씨(順興安氏) 회헌(晦軒) 안향(安珦) 종가를 싣습니다.



입력시간 : 2007/01/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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