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미소

영화 <파니 핑크>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서른을 넘긴 노처녀가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란 거리에서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라는 주인공 파니 핑크의 자조적인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독일 영화의 원제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 풍의 ‘노처녀의 좌충우돌 연애 편력기’ 쯤을 예상하겠지만, <파니 핑크>에는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공항 검색대의 직원, 채식주의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과 사랑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른 살의 파니 핑크. 그녀는 우리 모두처럼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인물이다. 그녀가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공허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생에 좀처럼 무감각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을,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니 핑크는 브리짓 존스보다 훨씬 더 실존적이며 예민한 자의식을 가졌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아니,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가 흐르던 장면이다. 우연히 만나 파니와 남다른 우정을 맺게 된 오르페오는 흑인이자 게이이자 얼치기 점성술사다. 그는 파니 이상으로 별난 괴짜지만 서로의 고민에 공감하며 파니와 진실하고 소중한 교감을 나눈다. 파니의 외로운 생일, 어둠 속에서 해골 분장을 한 오르페오가 촛불이 가득 꽂힌 케이크를 들고 파니 앞에 나타난다.

에디트 피아프가 당당한 목소리로 외치듯 노래한다.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 파니와 오르페오는 서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파니의 고민과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녀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 온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니 핑크>는 본격적인 예술영화도 대중적인 상업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더없이 진지하면서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영화다. 그래서 <나 이뻐?>라는 단편소설집이 <파니 핑크>의 감독 도리스 되리(1955- )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 그럼 꼭 읽어봐야지’라는 마음이 들었던 건 예의 ‘더없이 진지하면서도 더없이 사랑스러움’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도리스 되리는 소설가로도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다. 소설 외에 희곡과 동화를 집필하는 등 현재 영화와 문학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나 이뻐?>에는 ‘더없이 진지하면서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짧은 소설 17편이 실려 있다. 하나하나 작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수작들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예의 진지함과 사랑스러움은 욕망과 좌절이라는 울타리에 겹겹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도리스 되리는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들을 감싸고 있는 욕망과 좌절의 막을 하나하나 벗겨내게 만든다.

대부분이 여성인 소설 속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지독한 권태에 사로잡혀 있거나 숨겨진 허영과 속물근성에 갈등하는 중년의 중산층 여성, 혹은 손아귀에 넣을 수 없는 물질적 풍요와 삶과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약하고 충동적인 젊은 여성. 얼핏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이와 같은 설정은 그러나 독자에게 생생하고 절박한 공감을 얻어낸다. 뒤틀린 욕망과 그로 인한 쓰디쓴 좌절은 생의 어느 날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호텔 방값 역시 내가 지불한 것이다. 그는 빈털터리니까. 그는 아직 학생이다. 이 어리고 미숙한 아이에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차림표 뒷면에 그렇게 썼다. 나는 절망스럽다. 그리고 행복하다. 나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는다. 동시에 나는 흐느낀다. 정말 끔찍한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곧 이 관계도 끝날 거라는 불안감에 온몸을 떤다. 아니, 나는 어서 빨리 이 관계가 끝나기를 원한다. 끝나야 한다. 그와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처럼 다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녀들의 인생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빠졌다거나 막말로 ‘끝장이 났다’고는 더욱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 그녀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런데 그녀들의 위태로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발을 헛디뎌 밑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끝없는 지리멸렬함 - 그것은 한순간의 파멸보다 더욱 끔찍한 것일 수 있다.

“부부간의 증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증오예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죠. 난 부부 사이에서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뿐이에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에요. 가장 끔찍한 건, 그런 살해욕을 느끼고 나서 또 금세 새로 구입할 자동차의 색깔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다투고, 함께 잠을 자고, 뭐 먹고 싶냐고 묻고 하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일관성 없는 생각과 행동, 그건 정말 못 참겠어요. 정말 끔찍해요.”

그녀들은 덧붙여 말한다.

“사람들이 화해를 하는 건 더 이상 그 사람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죠. 그렇지 않다곤 말하지 마세요.”

도리스 되리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원한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 지금과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 자신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녀들이 만족할 만한 전복적인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고 현실에 만족하라’도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럴 때 바로 자신만의 ‘미소’가 필요하다. 촛불이 타오르는 케이크를 들고 서 있는 자신의 친구를 향해 진심으로 지어보였던 파니 핑크의 환한 미소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나는 담홍색 세무로 만든 하이힐을 신고 있다. 그를 위해 산 구두였다. 그는 내가 하이힐을 신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빨간색 하이힐을, 그는 빨간색 하이힐을 ‘죽이는 신발(fuck-me-shoes)’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제 몹시 의기소침해질 때만 빨간색 하이힐을 신는다. 그런 구두를 신고 있으면 허리를 펴고 걸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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