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방송자료 체계적 관리 전무, '문화강국' 위한 내실 다지기 시급

변변한 대중문화 ‘아카이브(archive; 특정 분야의 공공 기록이나 역사 기록이 보존된 자료실)’ 하나 없는 우리 대중문화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금년 초 대중음악산업의 모든 것을 담아낼 ‘초대형 음악타운을 광주에 조성하려는 계획’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대중음악연구소 강헌 소장이 발표한 야심찬 광주 아시아 음악타운 조성계획안이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2023년까지 총 1조4,445억여 원의 예산이 필요한 거대 프로젝트인지라 실현 가능성에 대해선 여전히 긴가민가하다. 솔직히 지금의 현실에선 내실 있는 대중문화 아카이브 하나가 더 간절할지도 모른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대중문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고열풍이다.

별난 물건, 시계, 로봇, 성문화, 짚풀 생활사, 등잔, 떡부엌살림, 화장품, 만화 등등 최근 소리 소문 없이 생겨난 근·현대사 관련 이색박물관은 수없이 많다. 기록 보존이 취약한 우리 문화의 특성을 생각할 때 반가운 일이다.

대중문화는 대중음악, 영화, 방송이 골든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대중음악과 방송 분야는 체계적인 아카이브는커녕 기본적인 1차 자료조차 구하기 힘들다.

영화 쪽은 유네스코가 유일하게 공인한 국내 아카이브인 영상자료원이 있다. 하지만 국가기관인 영상자료원조차 전체 한국 영화 가운데 64%의 필름과 스틸 사진, 시나리오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정도의 영화자료가 보존된 것도 1996년 영화진흥법 개정이후 제작되는 모든 영화 필름을 의무적으로 영상자료원에 제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중견 드라마 작가 이금림(58) 씨는 얼마 전 1990년대 초 방영한 자신이 쓴 KBS 일일 드라마 <일출>의 자료를 요청했다가 지워지고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황당했던 이 씨는 그 후 자기가 쓴 드라마는 일일이 녹화하는 버릇이 생겼다. 방송 드라마를 보존하는 공공기관이 있긴 하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다. 이곳에는 연구정보센터 소속의 예술자료실과 방송산업진흥센터 소속의 아카이브가 설치되어 있지만 연구 인력 한 명 없이 유명무실하다. 그럼 현재 방송사는 방송자료를 얼마나 보존하고 있을까?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된 이후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공중파방송사들에는 1990년대 초반 이전에 제작된 프로그램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매일같이 방송에 등장했던 이미자, 남진, 나훈아 등 당대 최고 가수들의 전성기 영상조차 두서너 개 남아있을 정도다. 70년대 최고 인기 드라마 <여로>조차 상징적인 한두 회 분만 남아 있는 형편이니 다른 방송물의 사정은 뻔하다.

MBC 드라마국장을 지낸 김승수 씨는 “최근까지 방송사들은 콘텐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많은 양을 다 보관할 수 없고, 또 보관해도 유통할 시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사반장>을 만든 김승수 PD도 “개인적으로 소장한 드라마 테이프를 기증하고 싶지만 기증할 곳이 없고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한다”며 “집안에 가득한 테이프 때문에 이사할 때마다 고역”이라고 한다.

대중음악 쪽은 황당하다 못해 처참한 형편이다. 2004년 10월 8일 탄생한 남이섬 가요박물관은 기대를 부풀게 했던 국내 최초의 대중음악 아카이브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794평 규모를 자랑했던 이곳은 컨텐츠 부재로 현재 개점 휴업인 상태다. 이처럼 대중문화 자료는 접하기가 힘드니 연구는 미진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분석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1960년대 멜로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충남대 윤석진 교수가 처음이었고 대중음악 쪽은 가수 하춘화 등 극소수다.

그동안 대중가요LP는 사실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아 이사를 할 때면 집집마다 버리는 1순위 품목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인들이 한국의 희귀 대중가요 음반들이나 노래책, 영상자료, 사진들을 싹쓸이하면서 요즘은 어지간한 70년대 이전 유명가수들의 가요 음반들은 수십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사정이 달라졌다.

이는 대중가요를 스스로 천시했던 대중문화 자료에 대한 인식의 후진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은 자국은 물론 전 세계의 대중문화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고 연구 또한 활발하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 없는 대중음악 자료는 다 일본에 있다”는 말까지 나올까.

지난달 아카이브 성격의 전시회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렸다. 2004년 세상을 떠난 작곡가 고 황문평의 유족이 기증한 2,593점의 자료 중 엄선한 600여 점을 개인문고 설치에 앞서 전시했다.

1층 전시실에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음반, 저서, 릴 테이프, <빨간 마후라>와 <꽃 중의 꽃>의 친필 악보와 시대별 사진, 각종 가요공로상 트로피가 공개됐다. 고 황문평 씨의 둘째아들인 황원규 씨는 “국립도서관이 문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개인문고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해 맡기게 됐다"고 말했다.

이치주 국립도서관 자료관리부장은 “1947년부터 개인문고가 시작된 이래 대중가요는 이번이 처음”며 ”개인문고는 그 분의 자료를 전시하고 디지털화해 관련자들이 연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운영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국립중앙도서관이 대중문화의 아카이브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황 씨의 귀한 자료가 실제로 잘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황 씨는 다행스러운 편에 속한다.

KBS가요무대의 자문위원인 SP음반 수집가 김점도(71) 씨는 몇 년 전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처분 못해 결국 신나라레코드사에 넘겼다. 공공기관이 대중문화 아카이브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것은 예산보단 대중문화 자료를 문화재로 보지 않는 인식 부족 탓이 크다. 대중문화가 정치나 경제 못지않게 부가가치가 높다는 것은 한류 열풍으로 증명되었다.

금년부터 남이섬 가요박물관은 가수협회에서 관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대중음악 자료들을 모아 전시하고 전산화하는 아카이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국이 문화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 콘텐츠 개발과 지원 체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업성만을 우선시 하다보니 대중문화의 뿌리가 황폐화된 것을 모른지 오래됐다. 하루빨리 대중문화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전환과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황문평 씨 유족이 기증한 악보, 녹음기 등 자료들

글.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