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는 즐겁다만 가슴까지는 좀…역사 왜곡 다룬 시대 풍자극, 어색한 스토리 전개가 완성도 떨어뜨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하고 말았다. 극단 빛누리가 선보이고 있는 시추에이션 뮤지컬 ‘아시아 인 러브 판판판(이하 판판판)’은 비중 있는 주제와 역량 있는 출연진을 갖추고도 가진 자원을 채 절반도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허비치 작, 홍민우 연출의 ‘판판판’은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억지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들의 횡포를 은유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한·중·일의 미묘한 관계가 한식이네, 쭝식이네, 일식이네 라는 세 음식점과 식당가를 통해 그려진다.

어느날 쭝식이가 한식이네 간판을 ‘쭝’식이네로 몰래 바꿔치기 하면서부터 문제가 일어난다. 이에 항의하는 한식이에게 쭝식이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대며 한식이네 식당 소유권을 넘본다. 또 한식이네에서 일하는 외국녀 ‘미미’는 몰래 일식이와 작당해 한식이의 보물을 훔치러 식당에 침입했다가 발각된다.

쭝식이는 공문서 위조 혐의로 강제 체포되고 일식이와 미미도 잘못을 반성한다. 한식이는 잃어버릴 뻔했던 식당 소유권을 되찾으며 아시안 대화합의 노래를 부른다. 한식이 역에 최낙희와 현철호(더블 캐스팅), 미미 역에 이주화, 쭝식이 역에 차순배, 일식이 역에는 원완규가 맡았다.

이 공연은 당초 ‘국내 최초로 역사왜곡 문제를 다룬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연출진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이 앞서 주제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듯하다.

출발만큼은 순조로왔다. 매우 드라마틱하고 호소력있는 음악, 볼거리가 충분하고 성의 있게 준비한 각국 의상과 전통 분장, 무대,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가창력 등은 공연 초반 관객들로부터 잇달아 박수 갈채를 받았다. 마치 물랑루즈쇼를 마주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극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러한 ‘눈과 귀의 즐거움’은 차질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정작 본론으로 접근해야 할 순간에 생뚱맞은 ‘아시안 장기 자랑’이 끼어들면서 공연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아샨 먹거리촌 축제’라는 이름 아래 갑자기 밸리 댄스, 중국의 경극, 택견, 심지어 비보이들까지 차례로 출연해 의아하리만큼 긴 시간에 걸쳐 특기를 펼친다.

‘왜 굳이 거기에 그것이 필요했는가’를 연출자에게 묻고 싶어지게 한다. 용도와 목적이 다른 2개의 공연을 억지로 한 무대 안에 짜깁기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긴 ‘아샨 축제’가 끝나자, 당연히 스토리는 시간에 쫓기기 시작한다. 갈등이 제대로 곪기도 전에 부랴부랴 결말로 내닫는다. 그토록 지독한 쭝식이가 단 몇 분 만에 공문서 위조로 체포되면서 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거나, 그 상황에서도 한식이가 경찰에게 ‘선처해달라’며 관용을 호소하는 설정, 간살스러운 일식이의 과잉 저자세 등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스토리의 완성도는 뮤지컬의 성공을 좌우하는 기본 조건이다.

좋은 시나리오는 좋은 배우를 만들 수 있지만, 좋은 배우가 좋은 시나리오까지 만들 수는 없는 법. 극의 구성만 잘 보정하였다면 ‘판판판’은 더할 나위 없이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연기와 무대 장치들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기에, 그래서 더 안타깝다.

‘역사 왜곡과 독도 문제를 다룬 국내 최초의 시대 풍자극’이라는 홍보 문구가 외려 무색할 정도다.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면 옷을 줄이든가, 살을 찌우든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판판판’은 4월8일까지 서울퍼포밍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