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보랏빛 꽃… 무에 부끄럽기에

이것저것 알아도 자꾸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래 전에 한 번 들은 이야기인데도 머리 속에 콕 박혀 언제나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유행따라 퍼졌다 얼마 뒤 사라지는 우스개 이야기는 들을 때 재미있어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면 항상 잊게 되고, 한 번 혼동되었던 비슷한 식물의 차이점도 언제나 같은 대목에 이르면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런데 ‘처녀치마’ 식물을 보면 내게 항상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대학 다닐 때 처음 식물채집을 나갔던 봄날, 독특한 모양과 빛깔의 처녀치마를 두고 은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처녀치마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까닭은 줄기 끝에 모여 핀 보랏빛 통꽃들의 모습이 마치 여성의 미니스커트와도 같아 보이기 때문인데, 교수님은 그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처녀의 치마이니 남학생들은 절대로 꽃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난끼 많은 남학생들은 당시 과(科)에서 홍일점이었던 나를 힐끔힐끔 눈치보더니 기어이 그 찬 땅바닥에 엎드려 꽃속을 훔쳐보고는 얼굴 가득 개구쟁이 표정을 짓던 모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꽃 속을 들여다본들 신비스런 보랏빛 꽃잎에 둘러싸인 수술과 암술만이 고왔을 터인데도….

처녀치마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의 산, 그중에서도 비교적 부엽이 두텁게 쌓인 비옥하고 습윤한 낙엽수림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위쪽이 더 넓은 도피침형인 잎들은 줄기와 땅이 만나는 지점에서 마치 방석처럼 둥글게 퍼져 달린다. 흔히 이른 봄에 꽃이 피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계절이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처녀치마의 잎새들은 늦은 가을까지도 그 흔적을 푸르게 볼 수 있어 좋다.

꽃은 4월을 전후하여 줄기 끝에 3~10송이가 모여 달린다. 꽃의 빛깔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랏색부터 적자색까지 다양하다. 개화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는 자녹색이 돌기도 하고 아주 드물게는 흰색의 꽃을 가진 개체도 있다.

처녀치마는 치맛자락풀, 성성이치마라고도 불리며 자화호마화(紫花胡麻花)라고도 한다.

처녀치마는 물론 관상용으로 개발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무를 심어 반 그늘진 장소에 지피용으로 심어도 좋고, 나무와 잔디가 있는 곳의 경계쯤에 군식을 해놓아도 보기 좋다.

관상용으로 처녀치마가 가장 좋은 장점은 겨울에도 파란 잎이 싱싱하지는 않더라도 반(半)상록성으로 푸릇하게 지면을 덮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에 산에 가면 지난해 달렸던 파란 처녀치마 잎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식용이나 약용으로는 개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어떠리. 봄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 보기만 해도 행복을 주는 그 가치만으로도 약용 못지않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산에 간다면 다소 비탈지고, 낙엽이 두텁게 쌓인, 그리고 아직도 잎이 나지 않은 나무들 사이에서 불끈 올라오고 있을 보랏빛 처녀치마를 찾아보자. 어린 마음으로 돌아가 이리저리 살펴보노라면 그 순결한 이름만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할 것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