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가구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을 출간했으며 ‘동서문학상’과 ‘현대시학작품’을 수상했다. 산문집으로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구입한 스프링노트의 표지에는 당시의 트렌드였던 파스텔화(畵)를 배경으로 윤동주의 ‘서시’가 인쇄되어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싯귀가 열두 살 소녀에게도 더없이 근사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해와 논리의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진실과 아름다움의 온전한 비밀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가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사를 짓는 무지한 촌부가 왠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저 ‘참 좋다’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것이 자신의 야망이라고 썼다.) 그러나 소녀는 나이를 먹는다.

열두 살은 열일곱이, 스물셋이, 윤동주가 죽은 나이를 지나 스물아홉이, 서른셋이 된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괴로워했다는 예의 싯귀는 여전히 진실되고 아름답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 한결같은 진실됨과 아름다움이 문득 버겁게 여겨질 수도 있다는 것임을 소녀는 깨닫는다.

하여 시(詩)는, 헤어진 연인 같다. 모질고 매정하게, 그러나 사실은 애써 도망쳐 온 연인 같다. 그 순정함을 감당할 수 없다는 못난 이유를 숨기기 위해 부러 상처를 주고 떠나온 연인. 그러나 버려진 연인은 말한다. 내가 준 상처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말한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짐짓 화가 난다.

그 우둔하고 미련한 연인에게 화가 나는 척, 사실은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정당한 변명을 떠올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화가 나지만, 화를 내지는 못한다. 결국 시라는 연인이 언제나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인들은 어딘가 순교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다시 윤동주의 싯귀를 빌어 표현하자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 시인의 주변을 공기의 입자처럼 떠다니는 것이다. 물론 이 각오는 결코 요란하지 않다.

시인의 각오에서 중요한 것은 ‘꽃’과 ‘조용히’다. 그렇지 않다면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그들의 담담한 듯 비장한 의지는 값싼 마조히즘의 혐의를 받게 될 뿐이리라.

“시인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말한다.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세상에 난무하는 온갖 말 속에서 그들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들리지 않음, 이 들끓는 침묵에의 헌신이 세상의 소란을 가라앉힌다.” (박형준의 산문집 <아름다움에 허기지다> 중에서)

시인, 그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인 너무나 사소한 순교자들 - 박형준은 그러한 정의에 꼭 들어맞는 시인이다.

60년대 후반 가난한 농촌에서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박형준은 ‘늦됨’이 자신의 인생의 주요한 화두가 될 것임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형 누나들을 좇아 인천으로 올라와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비가 오거나 백중사리 때면 하수구로 바닷물이 역류해 방안까지 물고기가 튀어오를 정도였다는, ‘수문통’이라고 불리던 동네는 박형준에게 ‘도시 변두리’의 원형(原形)으로 남아 있다.

그는 시인이 되지 못했다면 공원(工員)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한 손에는 신춘문예 투고 원고가 한 손에는 공장 취직이력서가 들려 있던 자신의 모습이 박형준이 기억하는 청춘의 자화상이다.

“시인은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같아요. 그렇지만 그 말은 과거에 집착한다거나 과거에 연연해 한다거나 하는 뜻이 결코 아니죠. 과거의 기억만으로는 부족해요.

삶이란 그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야 온전해지는데, 바로 거기에 필요한 게 상상력입니다. 그렇다고 나쁜 기억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윤색해서 거짓 추억을 만들라는 얘기는 또 아니죠. 아주 오래 전 유년의 어느 한순간, 나는 그 과거와 함께 살아가고 있어요.

그 순간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인생의 진실과 아름다움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과거와 함께 살고 있는 현재의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상력을 가동시켜 그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어느 날 우연히 바라본 나무 한 그루를 통해 그 의미를 불현듯 깨닫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비로소 그 과거의 기억은 온전한 추억이 되고, 시가 되는 겁니다.”

예의 늦됨이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시인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기억과 상상력을 버무려 추억을 만들어내야 할 시간이, 과거와 함께 살아가다 시를 잉태하고 탄생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박형준 시인은 농담으로라도 민첩하고 약삭빨라 보인다는 말은 건네기 힘든 인상을 가졌다. 서른을 넘기고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고, 연애의 유무를 떠나 현재 마흔의 싱글이다.

그의 시와 산문에 자주 등장하는 여든의 노모는 늦된 시인 아들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을 게으름이나 미련함과 관련된 갖은 별명을 지어 닦달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세속적인 것과는 무관해 보이는 수더분한 웃음에 유유자적하는 듯한 태도.

그러나 아니다. 시인으로서의 박형준의 이력은 결코 늦되지 않다. 박형준은 부지런하고 재바르다.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는 시인의 머릿속에는 짧은 한 마디 시어를 벼르고 다듬느라 거친 회오리가 일고, 번잡한 도시의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시인의 가슴속은 삶의 모순을 헤집고 곱씹느라 격렬하게 끓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바로 시인,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건 너무 쉬운 정의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시를 쓸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만들어 놓는 일이에요. 시의 상태로 자신을 유지시키는 것. 그게 핵심이죠. 시를 살지 않으면 시를 쓸 수 없어요.”

시인 - 시의 상태로 자신을 만들어내는 사람. 날카롭고 예민하게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바로 진실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임을 알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것.

어떤 의미로든 결국 순교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여 빠른 속도와 이윤의 창출이 유일한 미덕이자 이데올로기로 여겨지는 이 세상에서 시인으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박형준의 표현대로 가히 우주적으로 쓸쓸한 일인 것이다.

한 시인이 힘겹게 자신을 시의 상태로 만들어가며 감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독의 시간 속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싯귀들….

‘알 속에서 이미 날개를 편 새’, ‘늙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사람을 쬔다’, ‘내 소원은 모든 죽음에 / 창문을 하나씩 달아주는 것’, ‘달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 / 누가 사다리 좀 다오’, ‘변기 뚜껑을 열자 / 백조가 웅크리고 있다 / 몹시 추운 날이었다 / 처음엔 내 얼굴인가 했다’, ‘시골에서 보내온 감자를 삶아먹는 밤 / 어머니 한숨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네’,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늙은 청소부의 굽은 허리에 귀맑은 들판이 열리네’, ‘천공에 뭇별이 켜질 때까지 / 혼자서 침묵에 사육당해야 한다’,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 / 쇄골에 입술을 대고 / 잠이 든 여자는 / 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

“결코 클래식 마니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한동안 말러나 바흐의 음악에 빠져 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요새는 전에 없이 화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시가 전보다 간결하고 회화적이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나이를 먹어가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한 폭의 캔버스 안에 압축해 표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시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시인 박형준은 고유의 리듬과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물론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때로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외로운 일임에 분명하다. 시인은 특유의 무던한 미소로 그럭저럭 감당할 만하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과연 순교자 아니던가.

“몸이 개요. 문장이 술술 풀리고 시가 잘 써지면 흐린 날씨가 화창하게 개듯, 몸이 개는 느낌이 들어요.”

탁자 위의 두 찻잔이 거의 비워졌을 무렵, 마주 앉은 시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건 더없이 대수로운 말이었다. 박형준은 ‘몸이 갠다’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시인이 아니라, 시가 잘 써지면 정말 몸이 개기 때문에 시인인 것이다.


글, 사진 - 이신조(소설가)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