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바루마·아비샤이 마갤릿 지음·송충기 옮김 / 민음사 발행·12,000원

2차 세계대전의 미스터리 가미카제 특공대는 온전히 일본문화 특유의 광기였을까. 끝없이 되풀이되는 자살폭탄테러는 중동지역의 어쩔 수 없는 비극인가.

책은 그것이 어느 민족, 지역만의 특성도 병적 증상도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의 정체가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즉 반(反)서구주의임을 일깨워준다.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편견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그 반대로 서구에 대한 적대적 편견의 집합체다. 우리가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반미주의보다 포괄적이고 뿌리가 깊다.

이 낯선 사상(?)의 징후는 다음과 같다. 소비적이고 퇴폐적인 도시문화에 대한 혐오, 이성과 계몽에 대한 폄하, 영웅적 죽음에 대한 찬미.

그래서 가미카제나 이슬람의 자살폭탄테러는 옥시덴탈리즘이 갖고 있는 죽음 숭배, 영웅주의적 미학의 대표적 쌍생아다. 자살미학은 흔히 생각하듯 일본의 전통도, 이슬람의 전통도 아니었다. 일류 대학의 인문학부 출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출격 전에 부르던 노래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것.

그들은 군국주의적 호소에 맹목적으로 끌리지도, 전쟁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망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서양이 타락시킨 일본의 모습·자본주의의 탐욕과 천박함에 대항해 지적인 반란을 꾀한다고 생각한 젊은이들이었을 뿐이다. 철저히 잇속만을 따지는 상인의 삶보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죽는 영웅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서구주의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국수주의, 나치즘이나 파시즘 등과 겹쳐지는 이런 극단주의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그토록 혐오한 서양으로부터 왔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어느 날 서양문명이 몰려들더니 과학과 이성의 제단에 모든 걸 바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근대화가 선(善)이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화 앞잡이들의 거센 몰아침에 설 자리를 잃은 이들의 마음 속엔 반동의 기운이 싹트고 급기야 서양의 천박한 물질주의가 나라를 망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열등감과 질시가 뒤섞인 감정 속에 옥시덴탈리즘이라는 편견이 자리잡은 건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그런데 이런 상황은 서양에서 먼저 벌어졌다. 나폴레옹에게 패배하고 프랑스의 정치·문화에 짓눌려 상처받은 민족, 독일이야말로 반서구주의의 모태라 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프랑스의 계몽과 이성에 대항할 무기로 내세운 것이 혈통과 지역에 뿌리를 둔 유기적이고 민족적인 국가다.

이런 풍조는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일본의 지식인들도 이들의 사상에 빚진 바 크다. 결국 서양을 극복하고자 서양사상을 빌어온 셈이다.

만약 옥시덴탈리즘이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단순한 편견에 그쳤다면 저자들은 책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다른 문화를 혐오하는 이런 생각이 이데올로기의 외피를 쓰고 때로는 피를 부르기에 간단하지가 않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크메르 루즈군이 타락한 자본주의와 타협해 영혼을 잃어버린 도시라고 간주한 프놈펜의 시민을 인간으로 보지않았기에 가능했다.

자본주의를 건너뛴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서구화된 부르주아지를 숙청한 마오쩌둥도,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서구화의 모든 증표를 없앤 탈레반도 사상의 근저엔 옥시덴탈리즘이 자리잡고 있다. 물신숭배를 일삼고 퇴폐적인 문화로 얼룩진 서구는 그들에겐 말 그대로 지상에서 없애야 할 악(惡)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성과 합리주의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직관과 신앙을 중요시하는 삶을 몰아세우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이든 옥시덴탈리즘이든 다른 문명에 대한 편견이 위험한 증오, 전쟁과 살육으로 번진다는 데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살폭탄테러를 길러내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편견 탓으로만 돌릴 순 없을 터. 하지만 증오를 낳는 사상의 전파, 상호오염은 분명 인류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만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게 저자들의 의도인 듯하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