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 월간 <현대문학> 기획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일산에서 어린이도서관 ‘웃는 책’을 운영하고 있다.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1996), <빛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가 있으며, 장편동화 <오징어섬의 어린왕자>(1999), 그림책 <은행나무처럼>(2004)을 출간했다.

여자의 아름다운 손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우선 다소 고답적인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섬섬옥수(纖纖玉手). 보티첼리나 라파엘로 같은 서양화가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신이나 님프의 그것을 닮은 희고 부드러운 손. 이 손들은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체처럼 보인다.

연약한 한 마리 새나 물살에 흐늘거리는 수생식물을 떠올리게 하는 짐짓 비현실적인 손. 두 번째는 순정만화형(形) 손이다. 가늘고 긴,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려하고 늘씬한 손가락들. 이 손의 가장 큰 특징은 섬세함과 예민함이다. 모양새가 그러하기도 하지만 이 손은 손 주인의 더듬이이자 촉수로도 사용된다.

하여 이 손은 종종 신경질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까다로운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세 번째 아름다운 손은 우리 모두가 잡아본 적 있는 그 손, 어머니의 손이다. 우리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웠던, 갈수록 주름이 늘고 마디가 굵어지는 거친 손. 눈물과 한숨으로 사랑을 빚는 손. 마더 테레사가 병자를 돌보고 경건히 기도를 올리는 데 사용했던, 옷깃을 여미고 숭고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 그 손.

시인 김소연. 몇 차례 스치듯 지나치는 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눈여겨 봐둔 터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손은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순정만화 주인공의 손 같다고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손이 언제나 가장 먼저 알아채고 가장 많은 것을 느끼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가장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 정말 그렇지 않더냐는 말은 미처 묻지 못한 참이었다.

아무튼 손 얘기로 운을 떼야지, 생각하고 있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 카페의 이름은 ‘가자니아’. 지난 가을 이 카페에서 어느 소설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내게 그 소설가는 술을 마시겠냐고 물었다. 그러고 싶기도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둘 다 ‘아직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뉘앙스가 조금 달랐다. 오해 때문은 아니었다. 그 사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가자니아는 일산에 살고 있는 문인들을 여럿 단골로 두고 있다. 김소연은 어제도 이 카페에서 몇몇 작가들과 커피를 마셨다고 했다.

예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쥐어진 작은 티스푼이 익숙한 동작으로 에스프레소 잔 위의 휘핑크림을 떠올렸다. 그녀의 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도 여행 - 김소연은 지난 겨울 50여 일에 걸쳐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 혼자였고, 혹한에서 폭염까지 모든 날씨를 경험했고, 대륙을 일주하며 경험한 것은 성지순례적인 무엇이었다기보다는 버라이어티한 어드벤처에 가까웠다고. 그리고 그녀는 많은 사진을 찍었고, 틈틈이 서울과 일산으로 몇 장의 엽서를 띄웠다. 시인은 당연히 여행지에서의 엽서가 여행지에서의 전화나 이메일이나 편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를 근사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얘기를 들려주는 손가락에서 날선 과민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존재하고는 있다. 온전히 정제된 내밀한 형태로. 유난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인 경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모든 전학생들이 그렇듯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는데, 사투리가 가장 큰 문제였죠. 놀림을 당하는 게 싫었다는 차원이 아니라, 사투리를 쓰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전학 온 지 3개월이 넘도록 교실에서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반 아이들이 벙어리로 알 정도였고, 짓궂은 남학생들이 내 입을 열게 하겠다며 악의적인 장난을 쳤지만 끝내 침묵을 지켰죠.

그러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여동생과 둘이 피나는 사투리 교정연습을 했어요. 주도면밀한 서울말 완전정복. 우리 대화를 녹음기에 녹음해서 들어보고, 서울 사람들의 억양과 말투를 분석하고, 안 되는 발음을 될 때까지 연습하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해도 그때 당시엔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했는지….”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예민한 소녀는 신촌의 대학가 일대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된다. 덕분에 당시의 인문학적 분위기를 맛보며 전형적인 문학소녀의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고.

여고생 김소연은 자신의 생일 스스로에게 자축 선물을 한다. 정현종의 시집 <고통의 축제>. 소녀는 시집을 읽고 또 읽는다. 사춘기의 치기와 겉멋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문학소녀의 남다른 자의식에게 시는 이미 일용할 양식이었던 것이다.

김소연은 10년의 시간을 두고 두 권의 시집을 냈다. 공교롭게도 첫 시집에는 20대의 10년이, 두 번째 시집에는 30대의 1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20대에는 오직 분노의 힘으로만 시를 썼던 것 같아요. 너무 단정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어요. 아니, 나아가 감히 바라기까지 했죠. 계속 분노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분노를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20대의 들끓음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은 모든 청춘들의 지상 과제다. 물론 완전한 해결이란 불가능하며 고작 처리의 기술을 배우는 정도인데 그 대가가 만만치 않음은 유사 이래 변함이 없다. 꿈과 열정에서 들끓음을 떼어내기란 얼마나 아프고 힘겨운 일인가. 김소연의 첫 번째 시집에 실린 ‘학살의 일부’라는 제목의 연작시들이 의미심장하다.

많은 경우 청춘은 ‘타협’을 통해 어른의 세계로 진입한다. 무감각과 무감동을 배우고 거짓과 변명을 익힌다. 섬세하고 예민한 손으로 부드러운 기쁨과 경이로운 황홀을 느꼈을 시인은 역시 같은 손으로 날카로운 슬픔과 쓰라린 고통도 느껴야 했으리라.

‘밥을 안치는 것도 / 국을 끓이는 것도 / 빨래를 너는 것도 / 과일을 씻는 것도 / 숭배의 일부임을 알 것 같다’, ‘그림자 없는 생을 살아가기 위해 /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여자가 쓰는 물건들은 / 왜 하나같이 움푹 패어 있어 / 무언가 연신 채워 넣도록 생겨먹었는지 / 이 혹독한 봄날에야 / 대답을 찾아간다’, ‘분명코 뒷모습일 겁니다 / 총총히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돌아서며 / 사랑을 요약하는 / 달의 뒷모습’, ‘한 쌍의 다정한 말똥구리처럼 / 지구를 굴리며 걷는다 태양을 향하여 직진으로 걷는다 /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 지문 하나 남지 않게 닳고 닳도록 / 그러므로 말똥 같은 지구를 / 우주 벼랑 끝으로 굴려 떨어뜨리도록’, ‘큰 눈물은 양쪽 뺨을 타고 내려와 / 턱 아래에서 만난다’, ‘내가 들어 있는 너의 눈에 / 나는 걸어 들어간다 /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나 보리라 / 꽃 피고 꽃 지는 시끄러운 소리들을 / 더 이상 듣지 않고 숨어 살아보리라’

김소연의 두 번째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에 등장하는 싯귀들이다.

“두 번째 시집을 낼 때까지 시인으로나 인간으로나 여러 번 변태(變態)의 과정을 거친 것 같아요.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다행히 어리석은 조급함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었어요.

조금씩 천천히 갈등의 파장을 줄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물론 가까운 사람들이 힘이 되어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요. 요즘은 시를 제법 많이 쓰고 있어요. 좀 염치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쓴 시를 읽는 일이 즐겁고 좋아요.”

김소연은 일산의 명소로 자리 잡은 어린이도서관 ‘웃는책’(www.gigglingbook.net)의 관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녀 시절 꿈꾸었던 대로 시인이 되었고, 시인이 되고부터는 막연하지만 ‘이타적인 노동’을 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의 하나가 웃는 책이다.

자신은 그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뿐이라고 말하지만, 직접 책장 정리도 하고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는 시인 관장님의 웃는 책에 대한 애정과 포부는 더없이 각별했다.

그녀의 ‘가까운 사람’의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건축가이기도 한 남편 함성호 시인. 가장 잊을 수 없는 여행에 대해 묻자 김소연은 몽골 초원에 자리한 드넓은 ‘흡수굴 호수’에서의 기억을 꼽았다.

호숫가에 몽골의 전통 가옥인 ‘게르’를 세워놓고 시인 아내와 시인 남편이 밥을 지어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늘과 호수와 초원을 바라보며 수일을 보냈다고 한다. 서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들이 보았을 밤하늘의 별. 왠지 다음 세상의 시작을 상징하는 신화의 일부 같아 부러움을 넘어 판타지적인 동경이 일었다.

다시 그녀의 손을 바라본다. 김소연의 두 번째 시집 맨 앞에 놓인 ‘달팽이 뿔 위에서’라는 시에는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이란 구절이 나온다.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 가늠하고 어루만지고 보듬는 시인의 손.

그 시에는 촉각만이 나오는 게 아니어서 시인은 손으로 보고, 손으로 듣고, 손으로 냄새 맡고, 손으로 맛본다. 그리고 손으로 꿈을 꾼다. 그 꿈을 다시 손으로 적어 내려가면 바로 시가 되는 것인데, 그것이 그녀의 손이 아름다운 진짜 이유다.


글, 사진 -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