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야이어 지음·염정용 옮김 / 검둥소 발행·315쪽

“죽은 인디언만이 좋은 인디언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프레리 평원에서 백인들은 ‘좋은 인디언’들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 시초는 1864년 벌어진 샌드프리크 대학살.

남부 샤이엔족의 추장 검은솥은 백인들과의 평화협정을 맺고 백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합중국기와 백기를 꽂은 샌드프리크의 티피(북미 평원 인디언들의 천막집)에서 133명의 인디언들이 콜로라도 민병대에 의해 도륙을 당했고 그중 98명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책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역사소설이자 한 인디언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스스로를 ‘치치스타스’라고 부르는 샤이엔족의 올빼미여자. 그는 열네 살 때 여름, 부족의 적인 까마귀족(아리카라족을 백인들이 부르는 호칭)에게 납치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친아버지 점박이늑대만큼 용맹스런 노란손의 보호아래 점차 까마귀족의 생활에 동화되고 새로운 가족을 갖게 된다. 용기 있는 행동 덕에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을 무렵,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부족인 샤이엔족의 습격을 받게 된다.

친아버지의 공격 탓에 양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잃고 새 이웃들이 고통을 겪게 되자 올빼미여자는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흠모하던 개전사(샤이엔족의 엘리트부대) 늑대얼굴에게 신성한 가죽목줄을 건네주기 위해 떠난 여정. 하지만 출발부터 베호(백인)들의 총격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고 수호정령 마헤오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는데….

지은이는 북미 인디언 원주민 문화연구의 전문가다. 따라서 책에서 소설적 재미나 문학적 성취를 찾는 건 애당초 어긋난 기대일 수 있다. 샤이엔족과 까마귀족의 생활상이 알려진 그대로이고 주인공의 환상마저도 충실한 서사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지은이의 목적 또한 세상에 잘 짜여진 이야기를 내놓기 위함이 아닌 것 같다.

결국 지은이가 말하고 싶은 건 올빼미여자의 목소리에 온전히 묻어 나온다. “악령들에게 사로잡힌 나쁜 인간들만이 단지 가죽을 얻기 위해 들소들을 죽였다. (…)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 치치스타스족 중에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들소들을 죽인 사람은 결코 없었다.”

인디언들은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만 여겼다. 백인들처럼 황금에 눈이 멀어 땅을 파헤치고 들소를 마구잡이로 죽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자연 친화적인 삶이 짓밟히고 사라져간 역사는 그래서 아프다. 사람의 머리가죽을 벗긴다는 이유만으로 인디언들을 미개하고 잔인한 종족이라 몰아붙이기엔 문명의 죄악도 작지 않았다. 목사이자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했던 존 쉬빙턴이 광신에 빠져 인디언들을 살육하는 걸 ‘하느님의 뜻’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그 오만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140여 년 전 프레리 평원의 인디언이었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투쟁에 운명을 걸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백인들로 인해 더 격화된 부족들 간의 반목과 대립이 없었다 한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베호’들을 이겨내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었을까. 검은솥과 와인쿠프 소령의 평화를 위한 노력에 배신과 타협의 딱지만 붙이면 그만이었던 걸까. 결과적으로 신의를 저버린 인간들에 의해 희생당한 셈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희생자들의 책임은 아닐 터.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이라는 표제는 11월을 가리키는 인디언 말이라고 한다. 샌드크리크 학살이 일어난 달이 바로 11월이었다. 그 의미처럼 학살의 현장에서 올빼미여자는 살아 남았고 인디언들의 이야기는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구촌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작으나마 알게 해준다.


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