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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타운] 임권택 감독 '천년학'
소리꾼 의붓남매의 부평초같은 삶과 사랑
'서편제'에서 못다 풀어낸 영화적 이야기 완결판 불멸의 열정으로 이룩한 거장 감독의 100번째 작품







한 편의 걸작으로 영화사의 페이지를 장식하는 천재들도 있지만 임권택 감독은 그렇게 빛을 발한 천재과는 아니다. 길로 치자면, 마른 신작로와 질척거리는 흙탕길, 작게 난 오솔길, 대로를 모두 걸어 온 산전수전의 대가다. 그가 생애 최고의 주목을 받고 있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통해서다. 지난 3월 29일 서울 강남의 한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노작을 기념하기 위한 후배 영화인들의 헌정행사가 있었다.

이창동, 봉준호, 김대승, 이현승 감독, 안성기, 박중훈, 이병헌 등 배우는 물론, 수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한국영화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노거장의 업적을 기렸다. 충무로 선후배 영화인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지극한 노력과 뚝심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장인적 생애에 대한 진심어린 경외심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동서양을 통털어 한 감독이 10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놀라운 ‘사건’이다. 더군다나 예술가가 아닌, 생활인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해 영화에 대한 자각에 이른, 순수체험의 작가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올해로 72세인 임권택 감독은 그 기념비를 쌓아 올렸다.

중제: <서편제>에서 못다한 이야기 <천년학>은 1993년 <서편제>를 연출할 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다한 이야기'이다. 이 여의치 않은 사정이란 컴퓨터 그래픽(CG) 등의 기술 부족으로 당시로서는 표현 못할 장면들이 있었기 때문.

<서편제>는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집 <남도사람> 연작 중 <소리의 빛>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이 중 세 번째 이야기 <선학동 나그네>에는 도로가 강으로 변하는 제법 난해한 CG 기술을 요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10여 년 전에 비해 몰라보게 발전한 CG 기술에 의해 그 장면들이 가능해졌고, 송화와 동호가 해후하는 <천년학>의 클라이맥스를를 장식한다.

그러니까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이라기보다 그 자매편 정도로 보아야 한다. 전국 각지를 유랑하는 소리꾼 유봉(임진택)은 의붓남매 송화(오정해)와 동호(조재현)를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과 가난에 염증을 느낀 동호는 남매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연정을 느끼는 송화를 두고 충동적으로 집을 떠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 세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유봉의 집념은 꺾이지 않고 동호는 유랑극단에서 만난 여배우 단심(오승은)과 가정을 꾸린다.

아이까지 낳고 가장이 됐지만 동호의 마음 속에는 의붓누이 송화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만 나면 송화의 행적을 좇는 동호는 유봉이 죽고 누이는 눈이 멀어 저잣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후 송화와 동호는 잠깐씩 만났다 헤어지기를 되풀이하면서 애절한 관계를 이어간다. <천년학>은 전형적인 임권택 영화다. 의붓남매의 만남과 헤어짐을 줄기로 했지만 드라마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이 없다.

떠돌이 소리꾼 시절 자주 들렀던 주막에서, 한때 송화를 두고 연적관계를 맺었던 용택(류승룡)과 술대작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고 각각의 이야기 단위들도 훌쩍훌쩍 간격을 뛰어넘는다. 거창하고 그럴듯한 사건을 두지도 않고, 과장스레 만듦새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서편제>가 득음을 위해 딸을 장님으로 만든 모진 아버지 유봉에 의해 시력을 잃은 송화(오정해)의 한과 자기완성을 위한 피나는 수련을 담고 있다면, <천년학>은 완고한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 나간 의붓동생 동호(조재현)와 송화의 평생을 둔 로맨스를 좇아간다

. 표면적으로 사랑이야기지만 <천년학>은 짝사랑 혹은 다가설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지극한 감정을 보여준다. 중제: 임권택 영화의 속편 <천년학>은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자각이 생긴 이후, 임권택 감독이 만들었던 영화들의 총결산처럼 느껴진다. 궁극의 자기완성을 위해 세상을 떠도는 부박한 인물들의 삶과 구도자적인 여행, 그 속에서 느껴지는 한국적 정한의 세계가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만다라>, <티켓>, <서편제>, <노는 계집 창>, <취화선>, <하류인생>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여행의 서사는 <천년학>에 이르러 마침표를 찍는 느낌이다. 삶의 진리나 예술의 본질, 정붙일 고향을 향해 떠돌았던 임권택 영화의 인물들은 <천년학>까지 그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동호는 소리의 완성을 위해 평생을 떠돈 누이 송화를 위해 소리 공부를 하기에 좋은 집을 짓는다.

그 집에 누이와 함께 살게 되는 건 아니지만, 동호의 정성과 송화의 떠돎은 모든 걸 바쳐 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천년학>에는 임권택 감독 자신의 실존이 담겨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참모습을 찾으려는 내면적 고통의 행로가 의붓남매의 절절한 사랑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득음을 위해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응어리를 안고 사는 송화 마냥, 임권택 역시 예술가로서 영화감독에 다다르기 위해 험로를 지나왔다. 영화 속에서 그것은 의붓남매의 사랑이요, 영화 바깥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대한 불멸의 열정에 의해 가능했다.

<천년학>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그 구도자적 세계에 대한 은유로도 읽히는 셈이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마지막 장면에서 비상하는 두 마리 학의 우아한 격조는 임권택의 영화미학이 도달한 유일무이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입력시간 : 2007/04/1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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