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치에 가슴 '찡'…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생의 전부가 된 아이인간 말종에서 '아버지'로 거듭나는 개과천선 스토리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 아버지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유괴된 아이를 찾아 헤매는 가련한 아버지(<그놈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밖에서는 시대착오적 퇴물 취급에, 안에서는 무력한 가장인 고개 숙인 아버지(<좋지 아니한가>)도 있고, 생존을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조직과 가족 모두에게 버림받는 조폭아버지(<우아한 세계>)까지, ‘생기 잃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한국영화의 중심 화두 중 하나가 된 듯싶다.

<눈부신 날에>의 주인공 우종대 역시 그런 아버지다. 종대의 상태는 자못 심각하여, 그는 자신이 아버지인 줄도 모를 뿐 아니라 애타게 아빠를 찾고 있는 자식을 부정하고, 심지어 아이를 팔아 비즈니스를 하려 드는 인면수심의 비정함까지 보인다.

한국영화가 재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처럼 아슬아슬한 것은 한국 사회의 가족과 아버지들에게 뭔가 심상찮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눈부신 날에>는 가족 해체와 그에 따라 추락한 부권의 초상을 보여주면서, 부녀 간의 사랑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재확인하려 한다.

아버지와 딸

<눈부신 날에>는 쓰레기더미 위에 사는 인간 말종 양아치가 별안간 아버지가 되면서 생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전형적인 ‘개과천선 스토리’를 따르고 있다. 투견이나 야바위를 일삼으며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우종대(박신양)는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하 잡놈이다. 야바위가 시비로 번져 철창 신세가 된 종대 앞에 보육원 교사 선영(예지원)이 나타나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한다. 자신도 모르는 일곱 살짜리 아이가 있다는 것.

황당해하는 종대에게 보육원에서 자란 준(서신애)이가 배달되면서 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굴절된다. 준이는 종대를 살갑게 따르지만 풍파에 찌들고 메말라 버린 종대의 마음은 피붙이마저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일 뿐이다.

심란한 쓰레기장 컨테이너를 거처 삼아 시작된 부녀 간의 동거는 준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믿고 따라준 딸에 대한 부정이 새록새록 싹틀 무렵, 종대는 죽기 전 준이의 마지막 소원인 월드컵 응원을 계획한다.

<눈부신 날에>는 한때 박광수 감독의 신작이다.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으로 80~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기수로 꼽혔던 박광수 감독은 기록적인 흥행 재앙을 맞은 <이재수의 난> 이후 실로 오랜만에 컴백했다.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옴니버스 영화, 인권영화 등 단편 작업은 더러 해왔지만 본격 상업영화로 돌아온 건 무려 8년 만이다.

한국 사회가 봉착한 정치, 사회적 이슈들을 지식인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했던 예전의 박광수 영화들을 떠올린다면 <눈부신 날에>는 의외의 선택으로까지 보인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성'과 '논리'로 냉철하게 사회에 대해 발언했던 그가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손을 내미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개보다 못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양아치가 딸과 교감하면서 인간으로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화해의 메시지도 그러하거니와 가족 멜로드라마의 정석을 따르고 있는 것도 박광수에게는 남달라 보인다.

기나긴 공백이 있었지만 한때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던 박광수 감독의 연출력은 녹슬지 않았다. 일상적 공간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바꿔 놓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치밀하게 공을 들인 로케이션과 공간을 잡아내는 카메라는 강렬한 시각적 인장을 찍는 장면들을 여럿 만들어 놓는다. 종대 부녀가 기거하는 쓰레기장과 그 뒤로 보이는 고층 건물의 대조,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바다 등 공간이 주는 느낌이 영화의 정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덧붙인다면 부녀 간으로 분한 두 배우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부정에 굶주린 소녀 준을 연기한 서신애에게는 아역 배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위성을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무구함을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뻔한 신파조 클라이맥스에서도 감동을 준다.

실종된 아버지의 시대

<눈부신 날에>는 ‘실종된 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아버지의 가치를 회복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아버지가 없었던 아이, 가족이 없었던 남자가 만나 가족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우종대는 해체된 가족의 아버지다. 보육원에게 자란 준은 오로지 아버지라는 이유로 종대를 따른다. 마지막 순간, 영화는 우연히 맺어진 듯한 이 부녀 가족의 비밀을 슬쩍 일러줌으로써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눈부신 날에>는 박광수 감독의 이전 영화처럼 불친절한 전개나 애매한 시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이야기 단락의 연결이 찰지지 못해 군데군데 건너 뛴다는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특별한 의도가 있는 서사 전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시대의 변화다. 거대 담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 거리는 월드컵이라는 전 국가적 이벤트에 광분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모든 걸 던져 탐닉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엄청난 장애가 된다. 어쩌면 박광수 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전작의 흥행 실패나 상업성의 결여 등 외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급격하게 자리를 이동한 한국 사회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묘사해야 할 대상이 사라져버렸거나, 너무 빨리 바뀌어 버린 세상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찾지 못한 예술가의 고민이 언뜻 비쳐지는 것이다. <눈부신 날에>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끄집어낸 한 지식인 감독의 고뇌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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