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에 비친 소시민 삶의 풍경들

연극 <다리퐁 모단걸>은 정말 ‘모던(modern)'하다. 봄 내음에 딱 어울리는, 산뜻발랄한 작품이다. 제목 ‘다리퐁 모단걸’은 ‘텔레폰(telephone) 모던걸(modern girl)’의 개화기식 표현이다. 전화기와 신여성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공연은 극단 신기루만화경 제작, 이해제 극본·연출로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의상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작품은 전통과 서양 문물이 한데 뒤엉켜있는 우리의 개화기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국내 최초로 전화기가 도입되면서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4가지의 에피소드를 씨줄, 날줄로 엮어가고 있다.

아직 전화기에 익숙치 않아 황제가 걸어온 전화를 받고 외려 큰소리를 내질렀다가 나중에 실수를 깨닫고 황제의 ‘면죄 전화’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리며 전화기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신하의 이야기, 기녀를 짝사랑하지만 남성답지 못한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고민하다 하인을 전령사로 삼아 청혼하며 결혼하는 상인,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전화기의 속성을 악용하는 전화사기단의 이야기 등이 전개된다.

극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군악사 광선태와 신여성 서연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비련의 두 연인을 전화로 연결해주던 최초의 여성 전화교환수 김외출은 자신도 모르게 광선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면서 혼란을 맞는다.

<다리퐁 모단걸>은 연출방식부터가 참신하다. 마치 슬라이드 쇼를 보듯, 각 장면 전환 때마다 암전을 중간 장치로 하여 짤막하고 간결하게 상황과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암전이 될 때마다 다음의 장면 배치가 어떻게 될까 궁금증을 유발할 정도다.

스토리도 잘 정돈되어 있다. 자칫 구태의연해지기 쉬운 시대와 소재를 다루면서도 지루하거나 산만하지 않게, 주제가 ‘가야 할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 주요 줄거리 속에서도 음란 전화와 횡설수설 전화 등 전화교환원들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해프닝들을 순발력있게 녹여낸다.

유머의 지뢰가 전체에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틋하고 진지한 사랑에 대한 느낌을 전혀 흐트림없이 곧게 유지해나가는 점도 돋보인다.

사실상 주연인 광선태 역의 배수빈, 김외출 역의 최보광의 연기 또한 미덥다. 특히 최보광의 발랄한 연기가 반짝인다. 그 외에도 1인당 3, 4개 배역을 수시로 바꾸는 박수영, 성노진, 최석준 등의 변신술과 연기력도 볼 만하다.

다만, 이 독특한 구성과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하기까지는 전반부에서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최근의 다른 공연작들에게도 상당수 해당되는 사항이기는 하지만, 휴식없이 2시간을 넘기는 공연 시간도 관객에게는 다소 부담스럽다.

극 중의 한 장면. 실연으로 깊은 슬픔에 빠진 광선태에게 전화교환원 김외출이 조심스레 묻는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랑을 하면 슈가처럼 달달한가요, 아니면 커피처럼 쓴가요?” 광선태가 울부짖으며 한마디 답한다. 이어지는 관객들의 폭소. 왜 그랬을까. 사랑의 우문현답은 직접 들어보시기를. 공연은 6월3일까지 계속된다.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