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용 글·남정강 사진 / 한국일보사 발행·18,000원

어린 시절, 본관을 읊어보라는 아버지의 말은 참 희한하고 난감했다. 인구 순위 ‘넘버3’안에 드는 성씨라 아무개 계파의 몇 대손이라고까지 덧붙여 말하면 완전히 골동품이 되는 기분이랄까.

양반 따지는 시절도 아니고 종가도 아닌데 생경할 수밖에. 가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다루어지는 종가 이야기는 신기하긴 해도 다른 세상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펴고 보니 슬쩍 궁금해진다. 우리 집 종가는 어디에 있고, 종손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책은 보학(譜學)의 고수라 인정받는 저자가 주간한국에 1년 넘게 연재한 35개 종가 이야기 묶음이다.

얼마 전 서세(逝世) 400주년을 맞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의 종가다 하면, 먼저 류성룡의 생애를 차분히 짚어준 후 종택을 찾아 종손의 삶까지 생생하게 전하는 구성이 남다르다. 종가의 과거와 현재가 시간을 초월해 이어지는 느낌이 기묘하다.

왠지 종손의 얼굴이 문중 선현의 얼굴과 닮아보이는 것도 그 때문인 듯. 물론 수백 년의 세월에 씻겨 영광은 퇴색되고 세태에 휩쓸린 종손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의무에 갇혀 자유로운 인생은커녕 생활고에 시달리기 일쑤니 말이다. 호젓한 고택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숨은 애환이랄까.

그러나 이들이 숙명을 받아들이는 모습 속엔 분명 물질의 시대가 잃어버린 도덕적 견결함의 원형이 살아 숨쉰다.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종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典範)과도 같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종손들의 구국활동이 이어진 덕이다. 다행스럽게도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의 종가와 더불어 가문이 번성한 드문 경우에 포함된다. 하지만 독립운동으로 인해 종가의 맥마저 희미한 경우가 줄을 잇는다.

정묘호란 때 화의론을 펼치며 나라를 불길에서 건져낸 지천 최명길. 그의 13대 종손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부친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 탓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로 유명한 조선 중기 대정치가 약천 남구만의 종가는 더더욱 민망하다. 충남 보령서 구멍가게를 하는 종손 남영우 씨는 “저는 제사고 뭐고 잘 몰라요.

집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역시 부친이 종택을 버리고 위패조차 땅에 묻는 구국의 결단을 했기 때문이다. 숙종의 장인이었던 경주 김씨 수곡 김주신의 종가 역시 그 고초가 다르지 않았다.

이 모두가 단지 선대의 영화를 보존하는 데만 머물렀다면 결코 실행치 못할 희생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잘난 조상의 허울이 아닌, 문중의 중심으로 충효정신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이는 고리타분한 허례의 상징처럼 종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온당치 않다는 증거다.

충효나 종법(宗法)이 너무 거창하다면 ‘자녀교육의 본보기’로 종가를 되새기는 건 어떨까. 한음 이덕형과의 우정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은 52세 때 손자를 위해 친필로 천자문을 써주었다.

14대 종손까지 내려온 이 글은 손자의 정진을 바라는 할아버지의 진한 애정이 느껴져 훈훈하다. 퇴계 이황 역시 글자를 알기 시작한 손자를 위해 천자문을 썼다.

자신의 삶에 뿌리가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조상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언행을 이끄는 동기가 될 수 있다. 모두가 종가처럼 예법을 따지고 들 일은 아니다. 현실성도 없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왕조의 일성(一聲)이 말해주듯, 뿌리의 존재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내가 누구인가’를 찾으며 헤매는 현대인은 결국 뿌리 뽑힌 인간의 모습이지 않은가.

수백 년을 이어온 종가의 기풍을 시간 속에 묻는다는 건 매우 아까운 일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오롯이 간직한 그곳엔 분명 공동체 삶의 온기가 있다.

가끔씩 그리워지는 고향의 온기 말이다. 뿌리는 한 번 죽으면 되살리기 힘들다. 종가가 뿌리를 튼실히 키워갈 수 있게 우리가 관심을 갖고 물을 주며 볕을 쏘이게 해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책은 잃어버린 ‘나’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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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 philo9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