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신속·인내심이 생명, 불륜에서 정쟁까지… 역사를 남기는 속전속결 기록자

크든 작든, 그는 역사의 현장에 나란히 서 있다. 그것도 속전속결의 역사 기록자로 소리없이 함께 한다.

누가 알아주든 못 알아보든, 상관도 없다. 보이지 않는 중책이 이들 속기사들의 귀와 손으로 얹혀진다.

국회와 법정, 개인사의 소송 사건이나 범죄 수사, 기업의 전략회의 등 전 분야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중대사에는 속기사들의 손길이 함께 숨어 있다.

“ TV 뉴스를 보다가 ‘어, 저건 내가 (녹취록을) 썼던 사건인데!’ 할 때가 많죠. 그럴 때의 마음은 뭔가 뿌듯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묘합니다. ”

동학합동속기사무소 대표이자 경력 20년의 베테랑 속기사 박형섭(40) 대표. 오래 전 ‘일본의 빌 게이츠’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의 내한과 함께 열린 첫 사업설명회 속기를 맡았을 때는 그야말로 일대 전쟁을 치렀다.

당시 6ㆍ3빌딩에 꾸며진 행사장은 시작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계 인사들과 청중, 대거 몰려든 언론 취재진에 둘러싸인 채 초청된 동시통역사만 4명. 속기사 또한 4명이 소집되어 행사가 펼쳐졌다.

오전에 시작된 설명회는 오후 6시쯤에서야 겨우 끝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관계자측에서 바로 속기록을 넘겨주기를 원했다.

그 많았던 취재진과 청중이 모두 빠져나간 휑한 행사장에 속기사들만 홀로 남았다. 결과물을 재촉하는 관계자들을 곁에 둔 채 속기사들만의 숨 가뿐 시간 싸움이 벌어졌다.

“컴퓨터 속기로 하면 최대 90%까지 현장에서 동시에 내용을 따라잡습니다. 그래도 모두 완벽하게 기록할 수는 없죠.

그래서 미리 녹음기로 녹음해 둔 내용을 다시 되틀어 확인해가며 띄어쓰기, 오탈자 등을 고루 바로 잡아 2중 작업으로 기록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 날은 당장 현장에서 바로 결과물을 내놓으라니 여간 정신 없고 바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몇 십분 짜리가 아닌 장장 몇 시간짜리 설명회를 한번에 정리해야 했으니까요. ”

와중에도 건물 관리자가 찾아와 ‘불을 꺼야 하니 빨리 나가달라’며 닥달했다. 전용 노트북에다 녹음기, 이어폰을 껴안은 채 속기사들은 행사장 이곳저곳으로 쫓겨다니듯 자리를 옮기며 작업을 이었다. 한참 만에 겨우 최종 기록을 완성해 넘겨주고서야 그 피 말리는 전투가 비로소 끝이 났다.

“속기의 생명은 정확성과 신속성입니다. 정확성은 기본이고, 특히 갈수록 빠른 시간 내에 기록을 넘겨주기를 원하는 의뢰자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더 속도전 실력이 중요합니다. 작업이 더디다는 이유 때문에 거래가 끊기는 사무소들도 왕왕 보거든요. ”

흔히 일반인들이 속기의 대명사로 연상하는 것은 과거의 수필(手筆)속기다. 마치 지렁이 모양(?)과 비슷한, 암호식 문자로 직접 쓰던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속기업계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수필 방식 대신 컴퓨터 속기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손으로 쓸 경우 단 5분간만 작업해도 손목이 저리고 통증이 오던 반면, 컴퓨터 속기의 경우 최소 30분을 작업해도 끄떡없다.

요즘 속기사들의 작업 방식 대부분이 컴퓨터 속기법이다. 속기용 컴퓨터는 외형상 일반 PC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일반 키보드의 글자 배열법과는 다른, 속기 전용 키보드가 달려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속기전용 노트북으로 현장 기록을 담아낸다.

■ 수필 속기는 옛말… 컴퓨터로 작업

속기사의 또 다른 주요 역할은 녹취 작업이다. 법정 소송, 고소 사건 등과 관련해 참고 자료로 제출될 음성 녹음 테이프의 녹취록을 작성한다.

일반인이 속기사에게 녹취를 의뢰할 경우 통상 녹음 테이프 1시간짜리 당 30만원, 30분 이내의 내용은 15-20만원을 지불하게 된다. 단순한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인증 받은 제3기관으로서의 공신력에 대한 가치까지 포함된 비용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이에게는 녹취만큼 고역스러운 중노동이 없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수시로 녹음 테이프를 되돌려가며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받아 적어야 한다.

앉은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한 채 그렇게 몇 시간이고 내내 자리에 붙박혀 있다. 웬만한 인내심과 적응력 없이는 절대 견디기 수월찮은 ‘고문’이다.

꽤 숙련된 속기사라도 1시간 짜리 녹음량을 완전히 녹취하는 데 대략 3시간이 걸린다. 음질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5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녹음기를 틀어보는 횟수도 많아야 2번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고수다.

초보자의 경우는 확연히 다르다. 녹음 분량 30분짜리만으로도 받아 적는 데 짧으면 하루, 길면 하루 반이 걸리기 예사다. 박씨네 회사의 경우, 오전에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바로 몇 시간 뒤인 오후에 이미 회의록이 완성돼 기업측에 급송된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 회의가 연달아 열리는 날엔 아침부터 현장에 나갔다가 곧바로 사무소에 돌아와 기록 작성, 또 다음 현장에 참석, 작성 식으로 정신 없는 릴레이가 이어진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종일 여러 건의 회의록을 즉석에서 처리해 넘겨야 한다.

■ 녹취파일 속 사연도 가지가지

녹취를 통해 만나는 사연도 구구하다. 녹취 파일 속에서 속기사들은 본의 아니게 세상사의 극과 극을 접하곤 한다. 의뢰자의 하소연을 들어주다가 인생 상담사 노릇까지 이어질 때도 많다.

언젠가 50대 가장이 부인과 이웃집 남자의 불륜 문제로 찾아와 부인의 자백이 담긴 녹취 테이프를 맡긴 적이 있었다. 묻지도 않은 사연을 스스로 털어놓으며 내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중년의 남편. 결국 곁에 있던 부인까지 함께 울면서 얘기를 나눈 끝에 극적인 용서와 화해의 순간이 찾아왔다.

결국 아내를 끝까지 믿어주고 싶어하던 남편은 고소를 취하하겠다며, 멀리 이사를 떠나 부부의 행복을 되찾겠다고 했다. 아버지 뻘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함께 고민을 나누었던 박 대표는 당시 나이 29세, 미혼이었을 때다.

“워낙 어둡고 충격적인 사연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처음에는 제 마음도 괴롭고 세상이 싫어질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많아지면서부터 점차 언제부터인가 그냥 덤덤해지는 단계가 찾아오더군요. 어떤 복잡한 사건을 보아도 이젠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30대의 한 여성은 부모의 유산 분배 후 자신의 몫까지 탐 낸 친오빠로부터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겨 찾아온 일도 있다. 딱한 사연을 들으며 녹취록을 작성해 준 얼마 뒤 결국 여동생이 승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재산 관련 사건을 접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부자지간에는 소송이 있어도 모자지간의 소송이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어쩌다 한번 있더라도 결국 어머니가 취하하더군요. 모성애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강한 건지 알 수 있지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은 화성연쇄살인사건에도 경찰의 의뢰로 녹취 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부터 쓰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 외에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중대사건 상당 수에 관여했지만 기밀상 사례의 이름조차 공개할 수 없다. 그만큼 속기사들은 민감한 현장의 핵심부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베일속 존재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녹음기의 활용이다. 수필 속기 시절이든 요즘과 같은 컴퓨터 속기 때든 속기 현장에는 반드시 녹음이 병행된다.

일단 현장에서 직접 기록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언록을 동시 기록한 뒤, 나머지 불완전한 부분을 회의 후 녹음기를 통해 바로 잡아 완성하는 식이다. 특히 과거의 수필 속기 시절에는 녹음기의 의존도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손 글씨는 더디고 어차피 녹음기를 사용해 2차 작업을 해야 하므로 사실상 현장에서는 열심히 쓰는 척 시늉만 내고 마는, 속기사들끼리만 아는 피치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수필 속기의 한계가 가져온 속사정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도 녹음이 제대로 됐나 안됐나 그 점이예요. 만약 녹음기가 고장이 났다든가 배터리가 떨어졌다든가 해서 녹음이 안 됐다면 속기사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지는 일이지요.”

아날로그 방식이 디지털로 첨단화되면서 녹음기도 다양한 장비들로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수혜자 중 일원도 바로 속기사들이다. 특히 박 대표의 사무소에서는 자체 서버까지 독자적으로 확보하고 운용해 대외 보안 유지를 강화한, 국내 유일의 업체이기도 하다.

박 대표는 20년 전인 1987년 속기에 처음 입문했다. ‘월수 2,3백만원의 전문직’이라는 신문 광고를 본 뒤였다. 당시 그의 지인 중 속기사로 활동하면서 고소득을 올리고 있던 선배까지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배만 실제로 그만한 수입을 올릴 뿐, 나머지 대부분의 속기사들은 전연 밥 벌이 수준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요즘도 워낙 경쟁자는 많은 데다 취업 자리나 일감은 한정돼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속기사로서의 성공 여부는 사실상 실력차보다는 일감을 따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일단 첫 거래만 트고 나면 상대 의뢰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줄 경우 자연스레 고정 수입처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속기 협회의 연수 과정을 밟으며 강사 겸 직원, 현장 속기사로서 다역으로 뛰던 시절, 초창기의 박 대표 역시 설움 많은 시기를 거쳤다. 속기사이면서 절반은 세일즈맨이나 다름없이 살았다.

80년대만해도 당시 전국을 통틀어 속기 사무소라고는 서울에만 약 10군데 정도. 더구나 속기나 녹취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나 의뢰건수가 워낙 적다 보니 생존률이 극히 희박했다.

상당수의 속기사 선배들이 그같은 과정을 견디지 못해 중도 포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역시 끊임없이 곳곳을 찾아다니며 명함을 건네고 홍보를 다녀도 별반 반응이 오지 않아 포기하려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피 눈물 나는 자괴감이 떠나지 않았다.

박 대표는 그간 국무총리실, 국정홍보처, 사법개혁위원회, 각종 청문회 등 정부 요처의 기관들을 비롯해 대기업과 의회, 법원과 경찰의 법정 사건 관련 속기록을 다수 담당해 왔다. 국내 속기 사무소들 가운데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실적들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호기심 반으로 뛰어든 일이지만 이제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이것이 내 본분’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다면 국가적인 큰 기관들과 많은 작업을 했다는 점이지요. 초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한번도 이 일에 대해 크게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국회나 법원, 의회 등의 속기사는 해당 기관에 소속된 공무원 신분이다. 그 외 속기사들의 활동 형태는 박 대표처럼 사설 속기사무소 소속으로 일하거나 또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식이다.

속기 사무소마다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경력 3년차의 경우 연봉 2,500만원 선이다. 본인의 능력에 따라 시간 활용 면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오늘도 속기사들은 가방 한 켠에 또 하나의 아찔한 애물단지 장비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선다. 말했듯이, 녹음기다. ‘혹시 녹음기를 깜빡 잊고 갈 때는 없냐’고 묻자 곧바로 농반진반의 즉답이 날아온다. “그럴 수가 없죠! 녹음기 없이 현장에 가는 건 자살하러 가는 거나 다름없다니까요(웃음).”

● 속기사가 되려면

속기학원을 통해 기초를 쌓는 것이 안정적이다. 관련 자격시험으로는 대한상공회의소 또는 속기협회에서 주관하는 시험 2종류가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는 시험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향후 용도면에서 좀 더 유리하다. 공기관들의 경우 특정 자격증 취득자를 선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와 법원 등은 공채로, 그 외 일반 사설 속기 사무소에서는 공채 또는 추천으로 채용한다. 회의 횟수가 많은 공기관의 경우 직접 소속 속기사를 뽑는 공채 공고를 내기도 한다.

속기관련 동호회 인터넷 사이트 등에 가입하면 가장 최신의, 다양한 채용 정보를 얻기에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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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정영주 객원기자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