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9 선언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실천시대를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엔 ‘6월 항쟁’ 얘기만 떠들썩하고 ‘6.29 선언’이라는 말 자체를 들어보기조차 힘들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6ㆍ10에서 6ㆍ29까지 20일 동안 권력 내부에서 격변도 많았습니다. 군대동원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민주주의의 회복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국민들의 희생은 말할 것도 없고… 6ㆍ10 항쟁은 민주화의 요구였고 투쟁이었습니다. 반면 6ㆍ29 선언은 민주화의 제도화와 실천이었습니다. 6ㆍ10항쟁과 6ㆍ29선언이 지난 20년간 민주화에 있어서 두 개의 동테(바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지금은 6ㆍ10항쟁이라는 동테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 후 다물었던 입을 열고 인터뷰(6월 27일 조선일보 김민배 정치부장)에서 한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6월 전립선 암으로 수술을 받고 자율신경 기능이 망가졌고 걷기가 힘들고 말투는 어눌했다.

인터뷰를 읽으면서 전연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890~1969, 1953~1961년 대통령. <유럽에서의 십자군운동(1948년 나옴)> <백악관 시절(1963년 나옴)>의 저자)의 대통령 당선사와 대통령으로서 1952년 12월 2일 한국전쟁 전선 방문에다 1960년 6월 19일 4ㆍ19 이후의 서울 방문까지 그가 한국과 맺은 인연이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기간 육사 생도에서 육군 대위로 군에 있었지만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6월 17일 미국에서 나온 스탠디 웨인트로브(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명예교수. 1929년 생. 역사학 박사. <맥아더와 한국전쟁(2000년 나옴)> 등 11권 저술)의 <별 열 다섯-아이젠하워, 맥아더, 마샬- 미국을 구한 세 元帥 장군>을 보면 맥(脈)을 찾을 수 있다.

그건 아이젠하워 등 세 원수와 같이 노 전 대통령이 ‘예비역 육군대장인 장군 출신이며 육군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과 ‘6ㆍ25전쟁’과 관련 있는 세 원수와 6ㆍ25 때 사병으로 싸운 적이 있는 그와는 멀지만 연(緣)이 닿아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2월 2일 고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선을 찾았다. 당시 서울은 황폐했다. 새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맞으려 수 만 명의 환영인파가 중앙청 앞에 모였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미 국민에게 “내가 한국에 가 전쟁을 해결하겠다”고 공약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서울에 왔다.

그는 북진을 통해 통일을 바라는 이승만 대통령, “전쟁에서 승리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등과는 의견을 달리하며 한국 방문을 마쳤다.

그는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군인의 눈으로 보지않고 정치인의 눈으로 보았다. 그가 원한 것은 명예로운 휴전이다”는 클라크 장군의 비판을 수긍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달랐다.

“나는 자네(클라크 대장. 육사 동기)가 군사적으로 느끼는 기분을 아네. 그러나 나는 미 국민이 전쟁을 중지하라고 나에게 위임한 것을 보다 강하게 느끼네.”

“나는 한국을 떠나며 결론을 얻었다. 미국은 영원히 고착된 전선에서 맞서 있을 수 없다. 또 어떤 가시적 결과 없이 사상자만을 낼 수 없다. 조그마한 고지에서 제한된 공격전으로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아이젠하워는 4ㆍ19의 민주혁명 성공을 구가하는 서울에 1960년 6월 19일 대통령으로서왔다. 그때의 광경을 지금은 없는 ‘월간 진상’(60년 8월)은 전하고 있다.

“서울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사이에 오픈카에 서서 두 손을 흔들며 시민들의 환영에 답례하는 아이크 자신이 길을 비켜달라고 손짓할 지경으로 사람의 물결이 큰길까지 뒤덮었다.

시민들은 고층건물의 창구마다 ‘개미떼처럼 몰려 서서 깃발을 흔들며 환성을 울렸다. 일행이 남대문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앞을 여지없이 메워버린 인파 때문에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게 되었다…일본에서는 아이크가 수 십만 명의 시위대 때문에 방문을 취소해야만 했다….

해커티 공보비서는 감사를 표했다. “아이크가 방문한 나라는 많으나 서울에서와 같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환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아이젠하워는 방한의 느낌을 그의 회고록 <백악관 시절>에서 적었다.

“이 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바라고 있는 나는, 조찬을 같이한 많은 한국인들 앞에서 쿠데타가 (학생 봉기를 뜻함) 정권을 교체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 조찬회에는 4월에 서울에서 이 대통령을 추방하는 데모를 지도한 학생도 두 세 사람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나의 온화한 사고방식에 납득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폭력으로 투표함을 장악하였다는 이(李) 정권에 대한 비난이 사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투표로서는 그의 정권을 빼앗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런 가정 하에서 나는 데모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아이젠하워는 물론 5ㆍ16 쿠데타를 말한 것이 아니다. 18개월 전 일어난 쿠바의 혁명을 장군 출신 대통령답게 쿠데타로 보았기에 4ㆍ19학생혁명도 쿠데타로 본 것 같다.

어떻든 노 전 대통령, 대선 주자들은 아이젠하워 회고록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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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