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테러리스트와 맞선 아날로그 형사 초특급 활약12년 만에 돌아온 브루스 윌리스의 실감 액션 '짜릿'

땀과 때에 절어 꼬질꼬질해진 러닝 셔츠와 얼굴과 몸 곳곳에 난 상처를 트레이드 마크처럼 달고 다니는 열혈형사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

기쁘다 구주가 오신 크리스마스 날만 되면 어디선가 죽도록 고생하기를 반복해 온 맥클레인에게 또 다시 운명처럼 고난이 찾아왔다.

고난을 즐기고 역경을 돌파하는데 쾌감마저 느끼는 것 같은 이 ‘하드 바디’ 형사에게 새로운 시련이 주어진 것이다. <다이하드3>가 나온 지 12년 만에 돌아온 <다이하드4.0>은 그 동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했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영화다.

세상은 변했지만 우리의 존 맥클레인은 그대로다.

근엄한 형사라기보다 인생낙오자에 가까운 행색을 한 그는 숙취에 절은 얼굴로 가족들과 티격태격하다 악당들이 획책한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는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 한다. 일단 한 번 ‘맞짱’을 뜰 요량이면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불도저식 승부근성도 여전하다.

<다이하드4.0>에서 맥클레인 형사가 커버해야 하는 영역은 훨씬 넓어졌다. 빌딩과 공항, 지하철을 무대 삼았던 전작들에 이어 <다이하드4.0>은 미국 전역을 누빈다.

이번에 존 맥클레인과 상대할 적은 미국을 움직이는 네트워크망을 장악해 국가적 혼란과 공포를 야기하려는 두뇌파 디지털 테러리스트다.

■ 디지털 범죄에 맞선 아날로그 형사

7월 4일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거국적인 독립기념일과 상관없이 맥클레인은 아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딸 루시(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를 설득하느라 전전긍긍이다.

젊은 놈팽이와 밀회를 즐기는 현장을 급습했으나 애지중지 키운 딸내미는 성까지 어머니의 것으로 바꾸며 노골적으로 아비를 경시한다. 헛헛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들어온 무전.

뉴저지에 사는 해커 매튜 패럴(저스틴 롱)을 FBI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매튜의 골방을 찾아간 맥클레인은 정체 모를 괴한들의 총알 세례를 받는다. 이 때부터 매튜와 짝이 된 맥클레인은 전직 정부요원 토마스 가브리엘(티모시 올리펀트)이 지휘하는 네크워크 파괴 공작을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경찰’이라는 카피는 <다이하드 4.0>의 모든 걸 말해준다. 날로 지능적으로 변하는 범죄와 머리 좋은 범죄자들의 등장 때문에 경찰일 해먹기도 피곤한 일이 됐다.

디지털 테러리스트의 광란을 진압하기 위해 컴맹 형사 존 맥클레인의 생고생이 또 다시 시작된 것이다. 첨단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바꿨다고 하지만 맥클레인의 사건 해결방식은 과거 그대로다.

컴퓨터를 이용해 미국의 시스템 자체를 장악하려 한 테러리스트의 손목을 꺾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건 불굴의 투지와 뚝심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기술과의 싸움’이다. 극중에선 존 맥클레인이 머리 좋은 디지털 테러리스트와 싸우고 영화 바깥에선 CG와 특수효과를 뽐내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과 아날로그 생짜 액션을 내세운 <다이하드4.0>이 싸우는 것이다.

테크놀로지 만능시대에 변하지 않는 가치, 시큼한 땀냄새,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액션이 주는 쾌감을 이 영화는 찾으려 한다. 감독과 존 맥클레인 역의 브루스 윌리스가 시종일관 지키려 했던 제1의 원칙은 ‘실제 액션’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는 것. 제작진은 정교한 준비작업과 사전 리허설을 통해 실감나는 리얼 액션을 만들어냈다.

웬만한 건 몸으로 때운다는 원칙이 지켜졌고 자동차, 트럭, 헬기 등 위험한 폭파 장면들은 배우의 액션과 따로 촬영해 합성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10대 시절 마당에서 친구들과 <다이하드>를 찍었을 정도로 이 영화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언더 월드> 시리즈의 렌 와이즈먼 감독은 ‘다이하드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준수한 속편을 내놓는데 성공했다.

■ 구식 액션영화의 은밀한 매력

<다이하드4.0>이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의 확장은 좋은 아이디어로 봐주기 힘들다. <다이하드> 시리즈에서 중요한 건 ‘액션’이 아니라 ‘공간’이다.

디지털 시대에 생짜 액션을 보여주는 희귀한 시리즈라는 게 강조되다 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 운운하는 건 광고 카피로는 유용할 지 모르겠으나 이 시리즈의 정수와는 거리가 멀다.

<다이하드> 시리즈의 공간이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공동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폐쇄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공간, 그것도 폐쇄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다이하드>가 서부극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하이눈>을 닮았다. 은퇴 후 결혼해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원한을 품은 악당들 때문에 다시 한 번 주저 앉고 마는 <하이눈>의 게리 쿠퍼 마냥 존 맥클레인은 맘잡고 살아보려고 할 때마다 태클을 거는 사건에 휘말린다.

<다이하드> 1편의 한스 브루버는 그를 아예 ‘카우보이’라고 부른다. 무능한 가장이라는 그의 이미지 역시 서부극 영웅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더라도 <다이하드4.0>은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다. 쉰 두 살의 중늙은이가 된 브루스 윌리스의 노익장은 눈물겹고 두 시간 동안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액션과 긴장의 조율도 뛰어나다.

보고 있는 사람의 몸이 다 뻐근해지는 격렬한 액션 사이사이에 적절히 터지는 유머, 인생 선후배 사이인 맥클레인과 매튜가 주고받는 인간미 어린 대화도 효과적으로 배치돼 있다. 무엇보다 이런 고전적인 액션영화는 이제 희귀하다.

전지전능한 수퍼히어로들과 변신 로봇들이 활개치는 2007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다이하드4.0>은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식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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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