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B, 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우쓰미 아이코 지음 / 이호경 옮김 / 동아시아 발행 / 1만5,000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48명의 조선인 포로 감시인이 ‘B, C급 전범’으로 처리됐다. 이중 23명은 교수형이나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A급 전범으로 분류된 일본인 중 도조 히데키 등 겨우 7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상당수가 조기 출감한 반면 조선인 전범들은 해방 후 감옥에서 오랫동안 형을 살고 이후에도 재일 조선인으로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간다.

일왕의 전쟁책임은 불문에 붙여졌는데, 일본군 내에서 전서구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이들에게 도대체 어쩌다 ‘전범’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 것일까?

1942년 일본군은 남방 작전에서 26만1,00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연합군 포로를 붙잡았다. ‘죽어서도 포로가 되지 말라’는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돼 있던 일본군은 이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상 필요한 강제노동에 동원하기로 하고 조선인과 대만인을 대상으로 포로수용소 감시원을 모집한다. 5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조선 전역에서 3,000명이 모집됐다.

연합군 포로는 열대지방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비행장과 도로를 건설하는 등 강제노역에 동원됐다가 무려 4분의 1 이상이 숨졌다.

이 끔찍한 결과에 충격을 받은 연합군은 종전 후 포로 학대 혐의가 있는 이들을 전범재판에 부쳤고, 실제로 백인 포로들을 때리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 상당수가 전범으로 처리된다.

일본 정부는 “수용소가 조선인과 대만인에 의해 조직됐고, 그들의 낮은 교육 수준이 포로 학대를 유발했다”며 조직적으로 책임을 전가했고, 백인 포로들도 일본인 상관보다는 실제로 얼굴을 접했던 조선인 감시원들을 더 잘 기억했다.

일제시대에 끌려가 일본인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기만 한 이들은 사실 피해자였지만 조선에서는 ‘친일 부역자’로 몰리고 일본에서는 ‘전쟁 책임을 떠맡은 외국인들’로 취급 받는다.

42년부터 태국~미얀마 간 철도 건설 현장에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했던 이학래(82)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전후 교수형 판결을 받고 사형수 방에 수감됐다가 유일하게 20년형으로 감형돼 살아 남았다.

석방자들은 일본에서 ‘동진회’를 조직하고 50년 가까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했지만, 취로 차원에서 일시적 생계 보조금을 받는데 그쳤다. 우리 정부도 겨우 지난해야 이들을 ‘강제동원 희생자’라고 인정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1982년에 쓴 이 서적이 지난해 지상파 방송의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된 다음에야 알려지고 올해 번역본이 나온 것도 너무 늦었다.

무엇보다 광복 62주년을 맞는 이 때 소개할 만한 책들이 대부분 양심적 일본인 학자들이 쓴 것이라는 점이 가장 부끄럽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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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