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학도 무리가 펼치는 '꾼'들의 걸팡진 놀이판

극장에 들어설 때부터 벌써 낌새가 심상찮다. 세트로 보면 ‘100분토론’용이다. 길게 덧붙인 사각 탁자와 의자들만 덩그랗다. 객석도 탁자의 양 편에 계단식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드물게 보는 객석 배치법이다. 무슨 배심원단 같다.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이 본의 아닌 ‘방청객 겸 배심원’들은 멀뚱멀뚱 건너편 관객들을 서로 쳐다볼 뿐이다. 제작진의 창의적 장난끼에 처음부터 톡톡하게 당한다.

연출자 이상우의 변(辯) 그대로, 이건 ‘꾼’들의 놀이판이다. 극단 ‘차이무’가 벌이는 격년제 고수 열전중 2007년판 실험 코미디다.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상연중인 연극 ‘변’은 변학도의 무리를 빙자해 벌이는 한판 걸팡진 희극이다. 시인 황지우가 극본을 썼다.

질펀한 술판이 드러나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다 알아듣지도 못할 사투리 세례와 함께 아전과 기생들이 술판 속에 뒤엉켜 있다. 이야기 줄거리는 굳이 따로 간추릴 것도 없다. 우리가 아는 춘향전 중 변학도의 부임 대목만 따로 뺐다.

단지 춘향만 빠진 채 변학도와 아전, 기생들로 이야기가 꾸며진다. 내용은 고전, 시간배경은 현대판이다.

아전 박광정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변학도는 성균관 79학번’이라고 말한다. 변학도도 등산복 차림으로 부임해 이 색다른 퓨전 코미디의 진수를 슬슬 터뜨린다.

개성파 기생들의 갖은 교태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춘향을 갈구하는 변학도의 사모곡은 징그럽도록 절절하다. 눈에 보이는 내용은 이까지가 전부다. 욕정은 사랑의 유사품이다. 그래서 변학도의 사모곡은 관객을 잠시 혼란케 한다.

‘변’은 짧고 강하게, 계속 웃긴다. 극의 초반, 아전들끼리의 야간 회의 때부터 이미 이 색다른 희극의 개성과 재미가 감지된다. 기생단도 못지않은 신명과 웃음을 제조해낸다.

특히 탁자 위를 스테이지 삼아 벌어지는 ‘수청 후보 퍼레이드’는 각 여배우들의 노련한 역할소화로 관객들의 풍성한 박수를 받아낸다.

조명은 물론, 음악적 설정 또한 기발하다. 초반부터 퓨전 국악인지 귀곡성(鬼哭聲)인지 듣기 애매한 음악으로 객석을 휘저어놓는다. 나르시스트로 변한 변학도의 춘향 사모곡은 특히 객석을 누비며 줄기차게 자작시를 읊어대는 대목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어낸다.

이때에도 변학도의 기름진 시낭송과 정반대인, 너무나 천진하고 아름다운 동요풍의 연주와 미성의 허밍 등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극단적인 대비효과를 노린, 멋드러진 음악적 반어법이다.

연극 ‘변’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장점은, TV, 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실력파 인기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로 수식어가 필요없을 문성근, 최용민, 박광정, 강신일, 정석용, 이성민, 김승욱 등이 출연한다. 김지영, 전혜진, 박지아, 공상아 등 기생 배역 연기자들의 연기대결도 팽팽하다.

‘변’은 특이하게도 전라도 사투리로 구성된 ‘변라도’판과 경상도 사투리로 꾸며진 ‘변상도’판, 2종류로 공연된다. 변라도 버전의 경우, 변학도 문성근의 ‘엄숙한 느끼함’은 공연중에도, 후에도 여진이 강하다. 최용민의 리얼하고 시원한 연기, 박광정의 무표정한 다변연기 등도 명성 그대로다.

연극 ‘변’은 성인용이다. 여러 방법으로 호탕하고 옴팡지게 웃기는 이 연극을 보고 나면 문득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술 한잔 마시면서 ‘변’ 이야기나 떠들어대고 싶다. 아니, ‘시인 변학도’ 문성근 흉내나 내면서 야들한 시 한수 읊어대고 싶기도 하다. 9월14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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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