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하는 심장을 꺼내 고요히 들여다 볼 것

“그녀가 다시 피를 흘리기 시작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그 무렵 그녀의 살갗은 매끈한 빛깔을 완전히 잃고 묘한 녹색을 띠기 시작하다가 점차 자주색으로 변하더니 급기야 까맣게 되었다. 안면이 팽창하여 툭 튀어나왔고 건조한 배가 불룩해졌으며, 귀는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는 날도 있었다.

안구가 녹아내린 것처럼 꺼지기도 했고, 살갗에 기포가 생겼다가 터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자고 일어난 자리에 군데군데 얼룩이 배어 있었다.

다시 검은색 머리카락이 돋고 얼굴의 검버섯이 붉어지는 기미는 없었다. 그녀는 단지 젊은 누이처럼 소파나 식탁의자에, 방석에 피를 묻혔다. 그 붉은 피는 아오이가든 전체를 물들였다.”(-편혜영의 단편소설 ‘아오이가든’ 중)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더랬다. 지난 가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는 날’이 이어졌고, ‘안구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꺼지기도 했고, 살갗에 기포가 생겼다가 터지기도 했’던 시간들, 흥청거리는 어느 자리, 나는 유령이 아닌 척, 유령처럼 앉아 있었다. 그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조심스럽고 나지막히, 알아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들킨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이, 자기도 함부로는 질색이라는 듯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더랬다.

그러니까 그녀, 편혜영의 소설에는 ‘유혈이 낭자하다’. 흡사 슬래셔 무비를 보는 듯 가혹하고 참혹한 이미지들이 책의 행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버려진 아이들은 오물처럼 방치되고, 병든 도시의 여자는 개구리를 낳고, 디스토피아의 맨홀 속엔 시궁쥐 같은 아이들이 살고, 죽은 여자는 종일 동굴과 저수지를 떠돌다 죽어서도 살기 위해 잠자리에 든다.

가차 없다. 위로도 구원도 없다. 철저히 냉엄한 극단.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값싼 엽기 취미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끔찍한 하드코어 묘사로 주목을 받아보겠다는 얕은 심사는 더더욱 아니다. 편혜영 소설의 본령은 낭자한 유혈 그 자체가 아니다. 쿤데라의 말처럼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녀가 처음 말을 걸어주었던 몇 달 뒤, 지독히 차가운 바람이 불던 겨울밤의 광화문. “내일 아침으로 먹어.” 배불리 저녁을 사주고도 크루아상이 담긴 비닐봉지를 가슴에 안기고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려주던 그녀. 회사에 있을 때는 ‘소설가’ 같고, 소설가들과 함께 있을 때는 ‘사무원’ 같다고 자신을 설명하며 웃던 그녀.

연극 무대의 장이 바뀌듯 시간이 흘러 다시 광화문, 가을 태풍이 몰고 온 세찬 비가 쏟아지는 스산한 저녁이었다. 지난여름 편혜영은 두 번째 소설집을 냈다. 그녀는 여전히 중간관리직의 베테랑 사무원이다.

한동안은 계속 ‘젊은 소설가’라 불리겠지만, 이제 ‘신인 소설가’라 불리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빗속에서 종종걸음을 걷는 스커트 아래 그녀의 가늘고 흰 다리가 짐짓 춥고 피로해보였다.

“총성은 도시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들렸다. 처음 총성을 들었을 때 사내는 찔끔 오줌을 지렸다.

총성은 옆에 선 사람이 총에 맞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울렸다. 어느 날은 자신의 심장에 총알이 박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에서 터진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늑대를 잡기 위해 도시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사내는 더 이상 총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길고 커다란 총성 뒤에 오는 나지막한 정적이 좋아졌다. 박동하는 심장을 꺼내놓고 고요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정적이었다.”(-단편소설, ‘동물원의 탄생’ 중)

편혜영의 두 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에는 첫 번째 소설집 <아오이가든>에서만큼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불안과 분노에 시달리며, 함정에 빠지고, 길을 잃고, 파멸로 치닫는다.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는 좀처럼 잡히지 않고, 전원생활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일말의 기대를 품게 했던 관계는 어긋나고, 위태로운 일상은 더러운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가늘고 긴 그녀의 손가락이 커피가 담긴 따뜻한 찻잔을 감싸 쥐었다. 인상적인 영감을 받는 대상이나 코드가 비슷해 전에도 몇 번 그녀와 지방의 쇠락한 동물원이나 놀이공원, 디스토피아처럼 살풍경한 도시의 생리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난 봄 나는 그녀의 권유로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를 보았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았지만 영화는 더없이 가혹하고 섬뜩했다.

소설가 편혜영의 생의 첫 번째 기억은 미아가 되었던 기억이라고 했다. 3살 때였고 아버지를 따라 친척집에 갔다가 그 동네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지나가던 한 젊은 아가씨가 울고 있던 어린 그녀를 구해주었다.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젊은 여자의 옷차림이며 길고 부드러운 머릿결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4남매의 막내인 편혜영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언니들은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일 때가 많았다.

언니들의 보살핌과 영향 아래 그녀는 결코 유난하다고 할 수 없는 소녀로 자랐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야 라디오프로그램에 정성껏 엽서를 꾸며 보내는 여고생이었던 그녀는 그때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므로, 어디에도 유혈이 낭자한 소설에 어울릴 만한 치명적인 사건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채널을 통해서도 편혜영이 밝힌 적이 있거니와, 치명적인 결핍이나 과도한 분노는 그녀의 (혹은 동세대 작가들의) 예술적 질료가 아니다. 가난도 이념도 윗세대의 문법으로는 말조차 꺼내기 어렵다.

유혈이 낭자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에게 <세상에 이런 일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 소재로 삼을 만한 체험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오산이다.

그런 그녀에게 (혹은 우리에게) 짐짓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혹은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는데······’하는 의문일지 모른다.

커피를 리필해 준 카페의 여주인은 한눈에 보아도 까다롭고 엄격한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바로크풍의 테이블과 의자, 그와 어울리게 꾸며진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실내 인테리어.

어쩌면 그녀와 나는 우아한 카페의 우아한 여주인이 되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통속적인 부르주아 호사 취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무원이든, 무엇이든, ‘글’은 다른 무엇이 되어도 쓸 수 있지 않은가. 꼭 소설일 필요가, 반드시 소설가일 절대적인 이유가······!

그녀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근사한 꽃미남이라 불릴 만한 유명 연예인이 모자를 눌러쓰고 일행과 함께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와 나는 힐끔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를 잊었다. 한참을 잊었다. 그녀가 오정희의 소설 <불의 강>을 처음 읽었을 때의 얘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대해 ‘충격’, ‘압도’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일 때면 간혹 마주 앉은 여자의 무릎이 닿았다. 그럴 때마다 힐끔거리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을 보며 문득 모자 말고 좋아하는 게 뭐가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인지, 키높이 운동화를 신을 만큼 키가 작아 보이는 게 싫은지도 묻고 싶었다.

실제로는 그다지 작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없는 모양이라고 말하며 함께 웃고도 싶었다. 샌들이 아직 새것 같은데 왜 그대로 버려두고 왔는지, 샌들뿐만 아니라 그 집의 살림살이를 다 버려둘 작정인지도 궁금했다.

밤이면 관람차 불빛이 집을 비추는 걸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쉴새없이 질문이 떠오르는 걸 의아하게 생각하며 입을 꽉 다물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였다.”(-단편소설 ‘첫 번째 기념일’ 중)

자신의 박동하는 심장을 꺼내 고요히 들여다볼 것. 끝내 어설픈 구원을 섣불리 바라지 않기에 조금씩 이해와 위로를 이야기해도 좋을 자격이 생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가 최승자의 시를 얘기해서 나는 또 기뻤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시 구절이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다. 소설가 편혜영이 나직이 말했다. 소설을 쓰면서 더 이상 그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비오는 밤, 우리는 그 시의 제목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나의 오래된 시집에도 밑줄이 쳐져있었으므로, 집에 돌아온 나는 쉽게 그 구절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이제 진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 십 년 전에도 십오 년 전에도 / 똑같은 단어와 똑같은 문법으로써 / 물었었던 그 질문. / 그런데 어째서 그 질문의 배후에 / 이상한 흉측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는지 / 나는 언제나 내가 먹는 밥이 / 진실한 밥, 깨끗한 밥이기를 원했지만, 이게 뭐냐, 가해와 피해와 가학과 자학과 / 자기기만으로 얼룩진 밥. / (생각나니, Das Brot der frühen Jahre?) / 하지만 이런 게 삶일 줄은 몰랐다고 말하지 말자. / 서른세 살(너는 서른넷) 나이에 그렇게 말한다는 건, / 범죄 행위다. (······)” ( - 최승자의 시, ‘散散하게, 仙에게’ 중)

■ 소설가 편혜영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와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며, 소설집 <아오이가든>과 <사육장 쪽으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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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