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최조 여성 임원의 눈에 비친 비합리적 조직문화'대한민국 진화론' / 이현정 지음 / 동아일보사 발행 / 1만2,000원

커다란 얼굴 사진에 ‘삼성전자 최초 여성임원 이현정’이란 글자. 표지를 보면 대필작가가 쓴 유명인 자서전 같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 같은 선입견을 산산이 부수어 놓는다.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가 이 책을 삼성전자에 몸담은 게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이제 관둬야겠다’ 생각해서 썼다는 점이다. 저자는 “20년 이상 해외에서 살다 조국에 와서 마침내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찾은 게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구제불능의 청개구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한국을 떠난다고 밝혔다.

처음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임원으로 스카우트됐을 때 수많은 매체에서 쇄도했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던 그는 5년이 지나니까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이 샘솟았다고 한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주장이 뚜렷하고 어디서든 쉽게 적응하려 하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여성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냄비와 주전자가 윤이 난다”면서 동네에 새로 온 새색시를 칭찬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나도 크면 하루 종일 냄비 닦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야 하나’ 하고 걱정한 나머지 나중에 크면 외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였다.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바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은 후 AT&T, 벨 연구소, 루슨트 테크놀로지 등 미국 최고의 IT 기업과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는다.

IT 버블 당시 벤처 기업을 경영하다 잠시 실패를 맛보기도 했던 그는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임원’이란 타이틀을 달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가는 대신 한국의 기업에 입사했다면 이 정도 지위까지 올라가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지적하듯 한국의 기업 문화는 여성 인력을 ‘보물단지’가 아닌 ‘애물단지’로 여기고 충성과 복종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여성이 살아 남으려면 ‘가정을 희생하고 남자보다 2배 이상 열심히 일하면서 사내 정치에서도 줄을 잘 서는’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러고도 임원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물론 미국이라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당한 설득’이 먹혀 든다는 점에서는 한국과 달랐다. 루슨트 테크놀로지 재직 시절, 첫 아이를 가져 부른 배로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회사의 2인자급 상사가 갑자기 찾아 와 호통을 쳤다.

“당신이 임신 말기니까 내가 잘 봐 줄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말라.” 그러나 저자는 지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만삭인 나를 잘 봐 줘야 한다. 내 뱃속에 있는 아이는 당신이 은퇴할 즈음에 경제를 짊어질 새 세대의 주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이 제대로 크지 못하면 경제가 망해 당신의 은퇴생활은 여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솔직한 어법으로 저자는 ‘세계 최고의 비보이’는 나와도 ‘구글’은 나올 수 없는 한국 사회와 기업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는 아직도 혈연 지연 학연에 매여 있으며 나이와 성별에 따라 차별을 두고 조직에 대해 맹목적 충성심을 강요하면서 개인의 창의성을 죽여 버리는 한국의 문화를 ‘농경사회’ ‘획일적 제조업 문화’로 규정한다.

이어 이런 풍토에서는 일류 반도체 제조회사(삼성전자)는 나올 수 있을지언정 구글이나 애플 같은 창조적 지식기반 회사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꼬집는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저자의 DNA는 분명 한국인이지만, 그의 정신세계의 DNA는 미국인 혹은 국적 불명의 자유인에 가깝다. ‘창조적 자기파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은 한국인들에게, 특히 한국 기업의 경영인들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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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