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옷차림·차고 세일… 그래도 당당하다

이번 여름에 한 달 반 정도 한국 을 방문했었는데 ‘미국 거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왔다. 몇 주 동안 나를 관찰하던 일곱 살짜리 조카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심각하게 묻더란다.

“고모는 왜 매일 똑 같은 옷만 입어?” 라고 (억울하다. 사실 몇 번 갈아입었는데). 청바지나 추리닝 패션이 압도적인 미국 대학교에서는 이 고모도 베스트 드레서 중에 한 사람 이었다는 것을 조카는 믿어줄까?

몇 년 만에 만난 나의 절친한 친구 하나는 나를 보자마자 장롱을 뒤지더니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라며 가을 코트하나를 억지로 안겨 주었다 (계집애. 잘 입고 있기는 한데. 나 거지 아냐!). 거의 삼년 만에 간 한국. 속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다들 참 잘 입고 다닌다.

특히 적지 않은 한국 젊은 여성분들이 평상복을 거의 이곳 파티복 수준으로 입고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물어보았더니, 한 창 인기리에 방영중인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 나오는 미국 여배우들 옷 따라 입기가 유행이란다. 몇 십만 원 씩 하는 소위 명품 옷, 핸드백, 가방들을, 치킨 집 아르바이트생이 입고 걸치고 있다고 놀랄 일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많은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명품을 사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나! 정작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를 만든 미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명품의 “명”자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나의 동포들은 알까?

아직도 생생한 나의 어릴 적 기억 하나는 미군들이 부대 철조망 사이로 던져주는 사탕과 초콜릿을 받아먹던 일이다.

그 달콤함의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어릴 때 즐겨보던 “육백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등 미국 드라마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십 여 년 전 내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미국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사람들의 나라 일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이 환상이 깨진 것은 뉴욕 근처의 공원 벤치에 엄마랑 한가히 앉아서 “미국사람” 구경을 할 때였다.

우연히 우리 모녀의 시선이 어떤 홈리스가 아닌 보통 미국인의 다 떨어져가는 나달나달한 신발에 모아졌고, 우리는 동시에 “미국에도 못사는 사람이 있구나!” 라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십여 년 세월이 흘러 다시 밟은 이 땅에서 본격적인 미국 생활을 시작 하고야 나는 그들의 허술한 차림새가 꼭 못 살아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도 빈곤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오래 입어 단이 다 헤진 제작 연도를 가늠 할 수 없는 스포츠 자킷을 즐겨 입으시던 미국 어떤 명문 신학대학의 교수님이나,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난 단 벌 스웨터와 무릎 나온 바지로 가을과 그리 춥지 않은 L.A의 겨울을 끄떡 없이 나시는 내가 아는 다른 교수님은, 일반성이 떨어지는 지나친 예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잘 입는 미국인’에 관해서는 지역차도 심하게 있음을 인정한다. 몇 년 전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방문해 지하철을 탔을 때, 뉴스 앵커 들이나 입고 나올듯한 말끔한 정장 차림의 너무도 잘 차려 입은 미국 사람들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또한 할리우드 로데오 거리 같은 부촌의 풍경은 많이 다를 것이라는 것도 누구나 짐작이 가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저런 예외가 있다 치고, 그래도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입는 것에 관해서만큼은, 미국인은 검소하다는 것이다.

한참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경우를 제외 하고는, 이 곳 에는 도무지 유행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적을 두고 다녔던 교회는 흑인도, 나 같은 아시아인도 찾아보기 힘든, 전형적인 백인 교회로, 중산층 이상의 전문직 교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다.

나의 시선을 끌곤 하던 것은 몇몇 여성 교인들의 옷차림이었는데,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유행이 한참 지난 (예를 들어 큰 어깨 뽕이 들어간) 옷을, 너무나 당당하게, 그리고 공들여 (주름 하나 없이 다리고, 색깔 배합까지 고려해) 매주 차려 입고 오곤 했다.

옷을 오래 입기 위해 일부러 유행을 타는 옷을 피할 만큼 안티 유행파이던 나에게도 이 여성 분들의 시대를 초월한(?) 옷차림은 처음엔 당황함과 민망함으로, 그리고 나중엔 존경심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이 미국 여성 분들은 자신의 가치를 최신식 유행의 명품 옷에서 찾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자유 함을 가진 분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하다 옷 얘기가 길어졌는데, 사실 검소한 미국인의 진수는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고세일 (garage sale)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고 생필품을 사고 판다는 것은 대다수의 보통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아이디어이겠지만, 유학생활을 오래 한 덕에 차고 세일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차고 세일에서는 못 파는 것이 없다.

아이들이 갖고 놀던 크고 작은 장난감들, 작아서 못 입는 옷, 싫증나서 안 입는 옷, (놀랍게도, 가끔은 고인의 유품으로 나온 옷도 있다), 부엌용품, 가구류, 심지어는 고장 난 컴퓨터 까지, 차고 세일에서 못 파는 물건은 거의 없는 듯하다.

너무 낡고 헐어서, 가끔은 망가진, 보기에도 민망한 물건들도 적지 않게 나오는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물건을 팔고자 들고 나온 강심장들이 아니라 거저 주어도 갖고 싶지 않은 그 물건들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작게는 50센트에서 크게는 몇 달러까지의 가격표가 붙여진 작은 비닐 봉투 안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비비인형 옷들은 나에게 가장 인상적 이었던 차고세일 품목 중의 하나인데, 자기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 옷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하고 또 그것들을 팔아서 살림에 보태 쓰려는 젊은 미국 주부의 알뜰함에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었다.

나도 이제 미국 사람 다 됐나 보다. 사년 전 리치몬드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잠시 귀국하기 전, 학교 앞 도로변 인도에서 잡동사니 살림살이를 들고 나가 ”설마 누가 이것들을 사랴“ 반신반의하며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쑥스러워 하며 서 있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이제는 남들이 쓰다 버린 쓸 만한 가구를 보면 주변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갖다 쓸 만한 뱃장을 키웠으니 말이다.

유학생활 십년에 얻은 소득 하나는 화려한 명품 옷이나 브랜드, 고급 가구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에 일조한 내가 만난 모든 검소한 미국인들에 큰 박수를 보낸다.

■ 나종미씨

나종미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 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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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