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세계 구축한 스타일리스트… 관객과의 소통은 '글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0년대가 시작될 무렵 서울 서초동 영상자료원에서 이명세 감독을 만났다. 당시 이명세 감독은 <개그맨>으로 흥행에 실패했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재기를 하였다가 <첫사랑>으로 참패를 당했다.

필자는 이명세의 영화에 매료되어 <형사> 중독 카페 회원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한 때는 “이명세는 뛰어난 작가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영화 상영회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명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였고 필자는 성실하게 메모하였다. 행사 말미에 “시나리오는 서랍에 가득 들어있는데 투자자가 안 나서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라는 말로 분위기를 멋쩍게 했다.

그 후 이명세는 <남자는 괴로워>에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흥행감독으로 살아남았다. 필자는 대학 강단에서 이명세 감독의 초기 작품들을 한 컷 한 컷 분석하면서 새삼 그의 연출력에 감탄과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누구보다 열렬한 이명세 감독의 지지자였으며 이명세론도 길게 쓴 바도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공백이 존재하듯이 이명세 감독의 작품도 분석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2%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남았다.

■ 영화 '형사'에서 비롯된 찬반 논쟁

영화 < M >

2%의 공백은 <형사> 논쟁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형사>는 <형사>에 중독된 소수 관객과 <형사>를 폄하한 다수 관객으로 편을 갈랐다. 중독된 관객은 ‘이명세의 스타일은 그의 천재적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상찬을 했으며 외면한 관객은 ‘서사적 결함을 비주얼로 보충하려는 얄팍한 술책’으로 깎아 내렸다.

<형사>는 기대했던 흥행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극장에서 간판을 내렸다.

흥행 실패가 작품 실패로 직결되는 것은 위험한 도식이다. 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상한가의 자리에 등극한 이명세의 티켓 파워가 스타 강동원을 캐스팅했으며 최고의 미장센이라는 언론의 극찬도 한몫 거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관객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관객과 소통에 실패 했다는 것이다.

관객은 영화 제작의 지원군이다. 관객이 원하면 제작이 되고 외면하면 시장에서 팽 당한다. 관객의 지지는 속편과 특정 장르의 양산을 초래하기도 한다. 상업영화의 장에서 관객의 외면은 천재지변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일본의 괴짜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노골적인 관객애정관을 드러냈다.

그는 관객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 만약 당신이 내 영화를 보지 않는 그런 다수의 관객 중 하나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엉덩이를 걷어 차줄 거다. 하지만 당신이 내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나는 당신이 살인자든 도둑이든 아무래도 괜찮다”고 극단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대만의 후샤오시엔은 “나는 관객을 거절한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회적으로 관객의 지지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관객을 고려한 감독이거나 관객을 무시한 관객이거나 영화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려는 의지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명세는 자신의 영화와 관객이 소통하기를 희망할까. 물론 그렇다는 입장이 분명하다. 비주얼이 화려하다는 것은 시각적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한다는 숨은 배려가 깔려있으며 웃기는 상황 만드는 것 역시 웃음을 선물하려는 깊은 의도로 볼 때 관객을 의식한다. 하지만 최근작 은 관객의 배려보다는 감독의 영화적 욕심이 더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이 작품은 ‘첫사랑을 경험해본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는 감미로운 백일몽’같은 영화라고 감독은 말한다.

작가 한민우는 결혼과 작품 쓰기라는 두 가지 큰 일을 앞에 두고 첫사랑을 만난다. 단도직입적으로 ‘결혼에 대한 성찰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담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한 문장은 이 영화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99%를 놓치는 함정을 갖고 있다.

■ 관객에 대한 배려보다 감독의 영화적 욕심 강해

영화 <형사>

일식집에서 예비 장인과 작가가 만나는 장면이 여러 번 서로 다른 서사와 앵글로 반복되어 현실감이 사라진다.

이 장면은 바로 몇 마디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 첫사랑과 만남이라는 서사는 맥거핀이 되고 현란한 편집과 모호한 대사와 중첩되는 장면들만 우리의 기억과 시야에 나타났다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관객은 서사를 내던지고 인물도 내던지고 결국 영화를 감상했다는 순수한 기억 한 조각만 전리품으로 들고 극장문을 나설 가능성이 큰 영화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불친절한 영화거나 너무나 심오한 스타일을 시도한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모든 영화가 라면처럼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소수의 관객은 영화를 통해 정신의 깊은 울림을 맛보고 싶을 것이며 다수의 관객은 팝콘이 주는 맛 정도의 재미를 영화에 기대하며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이다.

좋은 영화는 라면 같은 맛과 친환경 유기농 재배로 생산된 쌀과 인삼을 섞은 보양식의 약효를 내야 한다. 이것은 1,000 편에 1 편 만날 정도로 극소수 영화가 보여준다. 모든 감독들에게 좋은 영화를 요청할 수 없다. 하지만 충무로 상업영화의 장에서 직업감독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노력을 요청할 수 있다.

이명세 감독은 에서 관객에 대한 배려 거부와 자신의 영화세계 구축이라는 갈등에서 후자에 분명한 방점을 찍었다. 그의 불친절함은 예술의 고지를 향한 지난한 행보일 수도 있지만 상업영화의 장에서 소수 관객의 추종과 다수 관객의 싸늘한 외면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

해묵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는 작가인가 아니면 영화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상업영화 감독인가. 감독이라면 소통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써야 한다.

관객의 요구에 자신의 영화를 헌납하라는 아마추어적인 주문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로 관객들이 들어올 여지와 다리를 만들 의지와 노력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는 유현목, 김기영, 이장호, 배창호를 잇는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다. 그의 스타일이 빛을 발하는 것은 보여주고 싶은 주제를 가장 잘 포장해냈을 때다.

동시에 그의 잘 포장된 주제는 관객들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축제의 카니발에 헌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매표소 앞 관객들의 지지로 인해 상업영화 감독의 자리와 이름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 문학산 (본명 문관규)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현 세종대 강사, 영등위 영화등급 소위원, 전주영화제 한국단편의 선택 비평가 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 저서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예술영화는 없다><한국 단편영화의 이해>의 저자. 영화 <타임캡슐 : 서울 2006 가을>, <유학, 결혼 그러므로 섹스>의 연출 경력.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학산 자유기고가 cinemh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