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안 한 엄마나 이혼모 모두 '싱글맘'해체되는 가정… 계모·계부 편견도 없어

잘 팔리는 책이나 영화는 거의 예외 없이 속편이란 것이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속편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많은 제작자들이 자칫 질 떨어지는 아류 만들기로 끝날 수 있다는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속편 제작을 강행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속편은 흥행의 보증 수표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도 영화 제작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에도 없던 속편을 쓰고 있다. 지난 회 ‘너무나 가정적인’ 이란 제목 하에 가사분담과 부부동반문화의 관점에서 본 ‘가정적인’ 미국 남편들에 관한 글을 쓴 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유인즉 나의 긍정적인 미국 가정 문화 읽기가 미국 가정의 붕괴라는 외면 할 수 없는 시대적인 추세를 과소평가 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지난 주 나의 글의 제목은 ‘너무나 가정적인- 단, 결혼이란 테두리 안에 머무를 때’ 라고 했어야 더 옳지 싶다.

미국의 싱글맘 가족. 한국의 싱글맘들이 이렇게 환하게 웃고 살 수 있을까.

나는 미국 TV드라마를 즐겨본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으로 공부하지 않고 TV를 볼 때, 공부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학생으로서 다소 고립된 삶을 자의 반 타의 반 살아야 하는 내게 TV 만큼 좋은 미국 문화 획득의 통로는 없기 때문이다.

TV 드라마를 통해본 미국 가정 제도의 붕괴는 일부러 눈감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히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다.

일례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친구들 (Friends)” 이라는 드라마를 보자. 놀랍게도 이 드라마의 여섯 명의 주인공 중 비록 우여곡절 끝이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인물은 챈들러와 모니카 단 둘 뿐이다.

로스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한 레이철, 역시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세 쌍둥이를 낳아 남동생에게 입양을 주는 페비, 두 번 이상 이혼한 후 평탄치 않은 이혼남의 삶을 살아가는 로스, 이들에 비하면 결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조이의 못 말리는 바람둥이 행각은 거의 애교스럽게 봐줄 수 있지 싶다.

정작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가정의 중요성에 관한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이 드라마를, 유례없이 높았던 시청률이 말해주듯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이혼의 급증에 따른 미국가정의 붕괴는 많은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은 그래서 인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특히 레이철 역의 제니퍼 애니스톤은 이 드라마의 성공을 통해 미국인의 연인으로 떠올랐다. 드라마 ‘친구들’의 성공은 미국인의 변해가는 가정에 관한 인식을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사실 미국에서 ‘가정’ 또는 ‘가족’ 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개념으로 진화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레이철이나 페비의 경우처럼 아빠 없는, 더 심한 경우는 아빠가 누군지조차 모르며 살아가는, 소위 결손 가정도 이 곳 미국에서는 엄연한 가정의 한 형태이다.

‘아빠 찾아 삼만리’ 가 아닌, ‘(아이) 아빠 찾아 (심한 경우엔) 열 명도 넘게 친자 확인’ 을 하는 젊디 젊은 미혼모 엄마들의 희비애락은 굳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악명 높은 ‘제리 (Jerry) 쇼’가 아니라도 이곳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더욱이 ‘미혼모 = 원치 않는 임신’ 이란 틀에 박힌 공식은 이곳에선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적지 않은 흑인(African American)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예를 들어,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자기아이) 있다”-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 아빠 없는 아이 낳기를 감행한다고 들었다.

또, 내가 아는 한 미국 여의사는 정자은행을 통해 얻은 초등학생 나이 또래의 아이를 아주 예쁘게 잘 키우며 살고 있다. 지금은 대리 아빠의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살뜰한 남자 친구와의 결혼도 마다하고 왜 굳이 미혼모의 길을 자청해서 선택했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자신의 ‘홀로 애 키우는’ 삶에 아주 만족하고 있고, 또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는 그녀의 남자 친구조차, 별다른 편견 없이 그녀의 혼자 가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것이다.

참, 나의 친구 비키한테 방금 전화로 물어 봤는데 미국은 ‘미혼모’ 란 말도 아예 없단다. 여기서는 결혼 후 이혼한 엄마나, 결혼을 한 번도 안 한 엄마나 똑같이 ‘싱글 맘(single mom)’ 이라고 부른단다. ‘미혼모’ ‘결손가정’ 등과 같이 꼬리표를 다는 말들 우리도 확 없애 버리면 어떨까?

미국의 ‘가정’ 개념의 변화를 보여주는 다른 한 예는 늘어만 가는 미국의 재혼 가정들이다. 언젠가 클레어몬트에 사는 친구언니의 고등학생 딸과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아이 말에 따르면 자기 반 학생 중 70% 이상의 아이들이 계모(step mother) 또는 계부(step father) 와 살고 있고, 심지어 몇몇 아이들은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계모 또는 계부와 살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계부 계모와 사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학대 받는 불쌍한 또는 제대로 된 부모교육 없이 막 자란 아이들이라는 편견).

이혼 후 부모 한 측의, 거의 예외 없이 엄마 쪽의, 자기 아이를 볼 권리와 양육 참여의 기회가 실질적으로 거의 주어지지 않은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에서 아마 이 편견은 일말의 진실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복잡해지는 가족 구조 안에서 미국 아이들은 보다 긍정적인 적응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는 이혼 후 혼자 사는 엄마의 새 남자 친구와도, 재혼 한 아빠의 새 부인과도 화기애애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남들보다 두 명 많은 네 명의 엄마 아빠를 가진 것에 대해 행복해 한단다.

물론 조숙한 그 녀석이 자기 엄마를 위로하느라 한 소리일수도 있지만, 이혼 후 ‘헤쳐 모여’ 가정에 대한 미국 사회 전반의 긍정적인 이해와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발언일 것이다.

딸만 셋을 가진 미국 사는 어느 한국 아버지는 아직은 어린 자기 딸들이 성장해서 결혼한 후 혹 이혼을 하고자 한다면 그 딸을 다시는 안 보시겠다고 호언장담한다고 들었다.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한국에 실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고 들었다. 우리 엄마의 고모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쫓겨 왔는데, 출가외인을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우리 외증조 할아버지의 완고함으로 어디론가 사라진 후 영영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고 들었다.

이제 한국의 치솟는 이혼율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고 한다. 쉬쉬 하지만 가까운 일가친척 중 이혼한 사람 한두 명 없는 집은 찾아보기 힘든 것도 받아들이기 싫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혼한 사람들을,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의 자녀들을 사회적인 편견의 음지 속에 가두어 둘 것인가? 이혼이란 것이 사람 마음대로, 특히 힘없는 여자의 입장에서는, 노력해서 피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란 것, 경험해 본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그 아버지한테 묻고 싶다. 당신 딸이 남편한테 맞아서 다 죽어 간대도 그냥 살라고 하시겠습니까? 혹시라도 이 저자가 ‘검은 머리 파뿌리 되게’ 살아야 하는 결혼생활과 가정의 신성함을 무시하고 이혼을 정당화하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신 독자분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성급한 오해하고 말씀 드리고 싶다.

일찍 결혼하여 함께 늙어가는, 특히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손이라도 다정히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라도 볼라치면 그 경건한 아름다움에 눈물을 몰래 깨무는 사람이 바로 이 글 쓰는 사람이다. 미국인의 이혼에 관한 관용과 이해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뿌리 깊은 미국 개인주의 정신의 반영 같다.

개인보다 전체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좋게 말해 공동체 중심의, 나쁘게 말해 전체주의적인, 한국문화에서 이혼 남녀들을, 잠재의식에서나마, 공동체질서 파괴자들로 보고 응징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수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자.

가정의 붕괴는 마치 교통사고와 같이 당신의 가정에, 당신의 아들과 딸에게, 그리고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돌팔매질이 아니라,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줄 이해와 사랑과 관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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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자유기고가 나종미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