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 파월장병 위문으로 훈장 3개 받고 방송금지 멍에 쓰기도

이미자는 1년 남짓 사이에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몸값 폭등과 더불어 성남극장, 우미관, 노벨극장, 금호극장 등 하루에 극장 쇼 네 곳을 도는 귀한 몸이 되었다. 작곡가 백영호는 생전에 “그땐 술집에서 술값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한 장 구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당시의 열풍을 회고했었다.

온 나라가 ‘동백아가씨’ 노래열풍으로 후끈 달아오른 1964년 겨울. 트로트를 천시하고 외국 팝을 선호했던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 서린 동경 음악실의 젊은이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미자는 파월장병들이 손꼽는 초청희망 1순위 가수로도 등극했다. 1965년 첫 월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뽑힌 이후 5년 동안 장병들에게 ‘동백아가씨’를 노래했다. 애절한 노래 가락은 장병들의 눈물샘을 자극시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처럼 ‘동백아가씨’는 계층을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가요였다. 이때의 공로로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치하는 물론 1973년 방한한 베트남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수여받은 가수로 기록된 이미자는 이후 국내외에서 3번이나 훈장을 받은 최다 서훈가수로 등극했다.

1965년 말 독주를 계속하던 동백아가씨 열풍이 주춤했다.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1962년 신설된 한국방송윤리위 ‘가요심의전문위원회’에 의해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던 것. 하지만 1966년 후속곡 ‘흑산도 아가씨’와 1967년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며 이미자의 인기 퍼레이드는 고속행진을 계속했다.

이미자 열풍은 현해탄의 높은 파고를 넘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는 6월과 10월, 11월 3장의 이미자 싱글음반을 제작했던 것. 그 중 2장이 ‘동백아가씨’ 음반이었다.

일본 정서에 맞도록 제목을 ‘사랑의 빨강 등불’로 변경하고 가사도 일부 수정하고 이름도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되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이후 반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시절.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취입했다’는 소문은 반일 감정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즉시 송환시켜라’는 비난과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여 황당한 불법음반이 등장했다. 미모의 외국여성 사진이 담긴 레이블도 없는 소위 ‘빽판’이지만 일본어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왔다.

재킷 뒷면엔 <이미자 히바리고마도리 유행가집>이라고 쓰인 조악한 등사지가 부착되어 있다. 일본에서 밀수입되어 음성적으로 배포된 ‘동백아가씨’의 귀한 해적판이다.

대중음악은 태생적으로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격변기에 등장한 ‘동백아가씨’의 여러 음반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대표적인 곡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미자는 대중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2006년 KBS 2TV ‘한국 한국인’프로는 박정희대통령과 일본외상이 청와대에서 함께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이미자의 공연을 구경하는 놀라운 모습을 방송했다.

금지가 되었지만 ‘동백아가씨’가 한일 공식 우호석상에서 버젓이 불리어졌고 박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대중음악에 대한 군사 정권의 이중 잣대를 실감나게 한다. 1987년 8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5곡과 함께 22년 만에 금지의 멍에로부터 벗어났다.

2007년, 한형모 감독의 67년작 ‘엘레지의 여왕’이 40년 만에 충무로 국제영화제를 통해 재 상영되어 화제를 뿌렸다. 이미자가 직접 출연한 이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동백 아가씨’의 방송 금지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최초의 대중가수 일대기 영상자료라는 사실이다. 이미자는 진정 살아있는 대중음악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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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