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의 시대를 향해서 진한 울분을 토해내다'메탈그룹은 성공 못한다' 관념 깬 80년대 빛나는 창작 앨범

록그룹 들국화 1집은 최근 음악전문가들에 의해 <대중음악 100대 명반> 1위에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변혁의 시대에 탄생한 이 음반 속 전인권의 포효하듯 절창한 노래들은 80년대 대중음악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왔다. 순위 자체는 이견이 있겠지만 이 음반이 한국대중음악사의 빛나는 창작앨범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 파괴력은 90년대 대중음악계의 지형도를 재편한 ‘서태지와 아이들’에 필적할 만했다. 들국화의 강력한 록 사운드는 ‘메탈 그룹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국내 대중음악의 체질 개선까지 불러왔다.

80년대는 화염병과 메케한 최루탄이 온 나라를 뒤덮었던 정치적 격변기였다. 긴 동면 같았던 군사정권 시대를 전복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탱천했다. 들국화는 변혁의 사회분위기가 잉태한 음악적 혁명과 동일시된다.

그들과 더불어 운동권 노래로 가요계차트에 진입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일궈놓은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반란은 뜨거운 시대상황 만큼이나 후끈했다.

그래서 록그룹 들국화의 등장은 75년 소위 대마초 파동으로 빚어진 대중음악의 긴 암흑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음악항쟁으로 여겨진다. 또한 조용필 1인 독주체제가 구축된 주류 대중음악계에 대한 언더진영의 도전적 ‘행진’ 같았다. 1집에 수록된 히트곡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했다.

이대 입구에 있던 포크가수 양병집의 음악카페 <모노>는 당시 신촌파 언더가수들의 사랑방. 개업 날 만난 전인권과 최성원이 ‘모노 결의’를 맺고 허성욱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면서 들국화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세 사람은 공연이 끝나면 기타를 둘러메고 이태원, 신촌, 방배동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음악적 야망을 품었다.

방배동 연주실 <이트>는 들국화 1집 탄생을 위한 자궁이었다. 1984년 5월 음악적 의견차이로 잠시 주춤했지만 옴니버스앨범 <우리 노래 전시회>를 통해 다시 뭉쳤다. 그 해 말 록그룹 ‘무당’의 공연 게스트 출연을 통해 이끌어낸 뜨거운 열기는 1985년 1월 동숭동 파랑새소극장의 단독 콘서트로 이어졌다. 10회 연장 공연은 끝없이 밀려드는 관객들에 대한 화답이었다.

소문을 듣고 이태원에 라이브 홀을 개장한 신중현이 초청을 해왔다. 이때 6인조 그룹 <믿음 소망 사랑>의 최구희, 주찬권과 인연을 맺고 서울스튜디오에서 1집 녹음에 들어갔다.

1985년 9월 마침내 록 역사에 기록될 명반 들국화 1집이 탄생했다. 창작, 녹음, 세션 등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진 이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의 시대적 구분의 기준이 되는 분기점 같은 음반으로 평가 받는다. 새롭지 않은 건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 디자인을 카피한 재킷 뿐 이다.

수록곡은 총 9곡. 당연히 모두 창작곡이다. 최구희와 허성욱의 감각적인 연주와 카리스마 넘치는 전인권의 보컬이 담긴 ‘행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 것 만이 내 세상’ 등은 변혁의 세상에 울분을 토하듯 했다. 새로운 음악, 색다른 무대매너와 멤버들의 튀는 외모에 화이트, 블루칼라 계층 구분 없이 열광했다.

1집 발표 후 신촌 크리스탈 소극장, 파고다극장을 시작으로 부산, 대구, 춘천 등 전국을 도는 6개월 투어가 시작되었다. 가는 곳 마다 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자본의 부족으로 조명, 음향 모두 열악한 무대였지만 젊은이들의 눈과 귀에는 그들의 열정적이고 신선한 음악과 모습만이 들렸고 보였다. 차츰 입소문을 타고 번져 나간 들국화의 명성은 음반의 대박을 예고했다.

‘봇물이 터졌다’는 말처럼 이후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뮤지션들이 긴 동면에서 기지개를 켜듯 줄을 이어 등장했다. 그래서 이들이 득세한 80년대 중·후반을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로 규정함에 이의를 달 대중은 거의 없을 것이다.

8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뮤지션이 활약했던 시기다. 국민가수 조용필이 온갖 장르를 섭렵하며 그 중심에 서 있다면 들국화는 이변과 변화의 중심에 서 새 시대를 이끌었다.

확실히 들국화가 선보인 새로운 감성의 창작곡들은 기존의 가요와 차별되는 그 무엇이 있었고 대중음악의 수준까지 진일보시켰다.

또한 600회에 달하는 이들의 소극장 라이브공연은 국내에 라이브무대를 정착시킨 빛나는 공헌이었다. 하지만 권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음악적 성향이 달랐던 멤버들이 차츰 음악적 충돌을 빚었고 대마초사건에 연루되며 해체의 수순을 밟았던 것.

1집에서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음악성이 이어지지 못한 점은 분명 대중음악계의 크나 큰 손실이었다. ‘따로또같이’의 리더였던 이주원은 “초기 들국화 멤버 4명은 음악적으로 최고였고 들국화 이름으로 4집까지만 냈더라면 록의 가요화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록그룹 들국화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2000년 윤도현밴드, 크라잉 넛, 델리 스파이스, 동물원, 언니네이발관, 강산에 등이 참여한 트리뷰트 앨범 ‘A Tribute To 들국화’가 세상에 나왔다.

후배뮤지션들에게 각인된 들국화의 위상과 영향을 확인시키는 앨범이다. 다만 사자머리의 튀는 외모인 리드 보컬 전인권이 마약과 자살한 여배우와의 파문으로 여론의 지탄 속에 침몰한 점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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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 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