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나은 개팔자 부럽네"

잘 나가는 “화려한 싱글”도 아닌, 중년의 “공부하는” 싱글인 나에게 주말이나 공휴일은 거의 쥐약이다.

반겨주는 것이라곤 마감 날짜 다가오는 페이퍼가 거의 유일한, 책방 재고창고 보다 조금 나을 성 싶은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득히 밀려드는 외로움. 누군가 이런 것을 실존적인 외로움이라고 했던가?

이런 날이면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거의 친동생이나 진배없는 띠 동갑 현이 에게 전화를 한다. 징징거리는 이 언니의 푸념 섞인 투정을 묵묵히 들어주던 동생 드디어 한마디 한다.

■ "언니 개 새끼나 한 마리 키우지 그래?"

사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개에 얽힌 아픈 추억이 있어서...

아픈 기억 하나: 나의 첫 번째 개는 내가 초등학교 때 근처 사는 이모 집에 가서 직접 분양 받아온 바둑이. 쇠사슬에 묵어두고 먹고 남은 음식찌꺼기를 먹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그 시절, 우리 집 바둑이는 온 식구 신발을 물어뜯어 놓는 것으로 스트레스와 설움을 풀곤 하다가, 어느 날 돌연히 흔적도 없이 가출해버리곤 말았다. 엄마는 어느 개장수가 끌고 간듯하니 그만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때 나는 꽤 먼 옆 동네까지 그 녀석을 찾아 원정을 다니곤 했었다.

아픈 기억 둘: 두 번째 개는 대학교 시절 친구엄마가 선물한 푸들 강아지.

가져온 첫날 ‘소변교육’ 시킨다고 때리는 시늉만 했는데, 이놈이 제 풀에 놀라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후 거품을 물더니 며칠 만에 이 세상을 하직 하고 말았다. 친구엄마는 자기가 예방접종을 안 시킨 탓이라며 나를 위로 했지만 어찌나 가슴이 짠하니 아프든지.

아픈 기억 셋: 제법 비싼 값에 동국대 앞 한 애견센타에서 사온 족보까지 있는 요크테리어. 맛이 밋밋한 인공 사료만 먹다가, 어느 날 테이블에 놓인 고구마튀김 한 접시를 보곤 이성을 잃고 (개도 이성이 있던가?) 몽땅 먹어 치운 후 부른 배를 주체 못해 뒤뚱거리는 것을 역시 ‘교육’ 좀 시킨다고 집 앞 잔디밭에서 뒹굴린 것이 화근이 되어 잔디진드기가 올라 그만 저 세상 강아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는 ‘개 교육자’의 자질이 없나보다.

■ 소아 우울증. 자폐증 치료에 개 이용 모색

내가 죽인(?) 강아지들이 너무 불쌍해서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었다.

사실 보통 정성 가지곤 개 못 키운다. 누가 그랬더라―개 키우는 것이랑 아기 키우는 것이랑 별반 차이 없다고. 이곳 미국 사람의 개 사랑은 정말 못 말리게 유별나다. 대부분의 미국 학교 아파트에서는 개를 못 키우게 돼 있다.

우리 학교에도 이런 금지조항이 있는데 ("No pet policy") 처음엔 혼자 이사 들어왔다가도 키우던 개를 못 잊어 슬그머니 데려와 같이 사는 바람에 문제가 된 학생들이 있었다.

그놈의 정이 뭔지. "개사모"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비슷한 것을 조직해 학교와 투쟁하다 결국 몇몇은 학교 아파트의 편리함-경제성과 근접성 등- 을 포기하고 학교 밖으로 이사나간 걸로 알고 있다.

TV 뉴스에선 본 일이다. 일 년 전 폭풍 카트리나로 루지애나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겨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 할아버지 한분은 정부의 비상 구출 작전이 개들을 구출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바람에 사랑하는 개와 생이별을 하고 자신의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혼자 살아나왔다는 후회와 자책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던 할아버지, 결국 물이 채 다 빠지지도 않은 옛집으로 개를 찾으러 가서 감격의 재회를 하는- 개를 붙들고 울더라―것을 보고 콧등이 시큰 한 적이 있었다.

이쯤 되면 개도 당당한 가족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할아버지에게는 아마도 그 개가 ‘유일한’ 가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집 지키는 강아지 새끼냐”는 흔히 듣는 우스개 소리처럼,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나의 부모님 세대 분들은, 주로 집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개를 키우는 일이 많았다.

미국 에도 이런 이유로 개를 키우는 분들이 있기는 있는 것 같다-예를 들면 대 저택에 사는 부자들의 경우처럼. 일년 전 과거 제법 알려진 한 영화배우의 관리 집사가 주인이 집지키는 목적으로 키우던 사나운 개들에게 물려 죽은 사고가 난적이 있다.

007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 미국인에게 개는 가까운 친구요 가족이다. 며칠 전 “가장 재밌는 비디오” 라는 시청자가 보낸 셀프 비디오를 편집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프로 사회자가 묻는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반드시 ‘짠’ 나타나는 것은 -비록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물론 대답은 개였고, 이 사회자는 항상 사람 곁에서 사람과 함께 하는, 그것이 집 안이든 집 밖이든 상관없이, 미국 개들의 가족으로서의 활약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는, 심지어 우리 인간과 감정적으로 교통하는 듯 한 놀라운 개의 능력. 이 능력에 주목한 몇몇 병원에서는 소아 우울증과 자폐증 치료에 개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도 한다.

■ 애완견들을 악세서리처럼 만들어 빈축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한국 골목길을 다닐 때 가장 공포스러웠던 일 중의 하나는 개똥 밟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개똥 밟은 적이 있던가? 없다! 개를 데리고 나온 개주인들 비닐봉지는 필수품이고 자기 개가 저지른 일은 반드시 즉석에서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다. 이렇게 미국인의 개 사랑은 책임감을 동반하는 것이라 아름답다.

미 동부에서 만난 친구 미쉘은 구호시설에서 굳이 병들어 버려진 개를 입양하여 큰 돈 들여 수술도해주고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있는데, 이 경우는 책임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희생과 헌신의 개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미국인의 유별난 개 사랑이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삼대 트러블 메이커 스타로 요사이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미모와 부를 겸비한 모델 겸 배우 (어떤 영화를 했더라?) 패리스 힐튼은 치와와 발바리 등 작은 애완용 개들을 ‘악세사리화’ 하여 이곳에서 빈축을 사고 있다.

아마 독자님들 중, 이 화려한 여인들의 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개들을 보면 왜 ‘먹는 것’ 갖고, 그것도 한 그릇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장난 하냐고 불쾌해 하실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말 나온 김에 말인데 여기선 개고기 못 먹는다. 멀리 멕시코까지 보신원정 가시는 이곳 교민분이 있다고 들었다.

개가 ‘가축’이 아닌 ‘가족’으로 인식되는 미국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할 일이다. 얘기가 곁길로 샜는데, 아무튼 개의 악세사리화는 ‘개의 개다운’ 삶을 방해하는 비 개권(?)적인 일인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개답게 사는 거더라?

■ 개사랑의 종착역은 인간사랑 아닐까

건강하지 않은 개 사랑의 다른 극단적인 예. 몇 달 전인가 미국의 한 부동산 재벌 할머니가 거액의 재산을 자기 애완견에게 상속하고, 정작 손자 손녀한테는 한 푼도 주지 않아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이 부자 할머니 나를 심하게 슬프게 만들었다.

자기 피붙이보다 개를 더 사랑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할 줄도 몰랐을 한 동료 인간의 비극적인 삶을 이 할머니를 통해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 소외의 산 증거로 보여질 때, 미국인의 유별난 개 사랑 마냥 좋게 평가 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개 사랑이 개 사랑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 개 사랑의 종착역은 인간사랑,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개 사랑 제대로 합시다!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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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