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문 닫는 서울서 유일한 단관극장 (옛 화양극장)멀티플렉스 홍수에 떠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추억의 명소

20년 전 대박영화 '더티댄싱' 상영… 지금은 보기 힘든 대형 그림간판 눈길
백화점처럼 둘러보는 멀티플렉스와 달리 꿈과 낭만 깃들어
중장년층은 물론 20대젊은 관객까지 몰려 마지막 향수 달래

서울 서대문 네거리 일대는 도심과 가깝지만 의외로 개발이 덜 된 탓에 번화함을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의 시계’도 여기서는 속도가 느려진다. 주변 풍경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부터 새로운 빌딩이 일부 들어섰지만 여전히 1970~80년대 분위기가 물씬 배어난다.

예전 모습을 많이 간직한 동네답게 이곳에는 터줏대감도 적지 않다. 서대문경찰서와 이웃하고 있는 극장 드림시네마(옛 화양극장)도 그 중 하나다. 드림시네마는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대세로 굳어진 요즘에도 단관극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단관극장은 대형 스크린 한 개만을 보유한 옛날식 극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말이 옛날이지 10년 전만 해도 극장의 표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단관극장은 서울에서도 딱 한곳, 드림시네마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드림시네마도 더 이상 세월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게 됐다. 내년이면 서대문 일대 재개발로 헐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날을 앞둔 드림시네마는 요즘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열고 있다. 지난 11월 하순부터 20년 전 대박 할리우드 영화 ‘더티 댄싱’을 마지막 작품으로 내걸고 장기상영에 들어간 것이다. 관람료도 20년 전 가격인 3,500원을 받고, 이제는 사라진 대형 그림간판을 내건 점도 옛 향수에 젖게 한다.

패트릭 스웨이지, 제니퍼 그레이 주연의 ‘더티 댄싱’은 1963년 여름의 미국을 배경으로 청춘남녀의 사랑과 우정, 성장을 그린 댄스영화로 1988년 1월 국내 개봉돼 당시로선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또한 ‘The Time Of My Life’ 등 영화에 담긴 주옥 같은 삽입곡들도 오랫동안 국내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더티 댄싱’을 드림시네마 최후의 상영작으로 선택한 것은 이 극장 김은주 대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스틸사진처럼 또렷하게 각인된 이 영화라면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질 드림시네마를 영원히 추억할 수 있게끔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한 것.

김 대표에게 ‘더티 댄싱’은 그저 한 편의 괜찮은 영화가 아니라 인생을 좌우한 영화다. 미성년자관람불가 등급으로 국내 개봉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 대표는 세 번의 퇴짜 끝에 화장과 변장을 동원해 지금은 사라진 서울 신촌 크리스탈극장 입구를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더티 댄싱’은 어린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시네마 키드’였던 그가 어른이 되어 결국 영화관련 직업에 종사하게 된 것도 거기에서 비롯된 인연일 터.

“제가 평생 본 영화 중에 짜릿한 느낌이 가장 강렬했던 영화가 바로 ‘더티 댄싱’이에요. 아마 100번쯤은 봤을 텐데 모든 장면을 다 외우는 정도죠. 재개봉을 결정하고 필름을 수입할 때 걱정한 건 오로지 그때 그 느낌을 되살릴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어요.”

김 대표는 원본 필름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을 뿐 아니라, 폐관될 극장에 스크린과 음향시설도 새로 설치할 만큼 ‘더티 댄싱’의 완전한 부활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 덕분인지 요즘 드림시네마에는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 추억을 되새기며 찾아 오는 중ㆍ장년층뿐 아니라 비디오를 보고 자란 20대 젊은이들도 적잖이 몰려든다. 평일에는 평균 200~300명, 주말에는 700~800명 가량이 찾는데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최근에는 수백 명 단위의 직장, 학교 단체 관람객 예약도 이어질 만큼 심상찮은 인기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형 멀티플렉스와 최신 개봉영화가 즐비한 터에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어떤 이유로 드림시네마를 찾는 것일까.

무엇보다 추억을 갈망하는 잠재 수요가 상당히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반응에서도 쉽사리 감지된다. 몇 차례나 되풀이해 관람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멀리 지방에서 일부러 발걸음을 하는 관객도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극장 구석구석을 살피며 옛 정취에 흠뻑 빠져들기도 한다.

김 대표는 “10년 동안 영화 일을 해왔지만 이처럼 모든 관객이 한결같은 호응을 나타내는 건 처음 겪는 일”이라며 “관객들이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도 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단관극장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될 구식영사기가 드림시네마에 전시돼 있다.

단관극장은 천편일률적인 멀티플렉스와 달리 ‘고유의 멋’이 있다는 분석도 새삼 주목된다. 즉 단관극장 관객은 보고 싶은 영화를 미리 선택해 기대감을 갖고 찾는 만큼 영화에 대한 정서적인 애착과 집중이 강한 반면, 멀티플렉스는 마치 화려한 백화점을 건성으로 둘러보는 것처럼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낮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 한 문화평론가는 “단관극장을 찾는 관객은 먼 곳에서도 일부러 그곳을 찾는데 그 과정에는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꿈과 낭만이 깃들여 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나 영화관람을 문화향유가 아닌 그저 ‘소비행위’로 전락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멀티플렉스는 불과 10년 만에 국내 극장산업의 지배자가 됐다. 영화제작이 산업화하는 마당에 영화유통도 대자본 중심의 산업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 영화 고유의 개성과 감동은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단관극장 드림시네마의 얼마 남지 않은 운명은 그런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웅변해주는 듯하다.

■ 지방 중소도시까지 장악하는 멀티플렉스의 위력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06년 12월 기준 전국의 극장 수는 321개, 총 스크린 수는 1,880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멀티플렉스는 198개 극장에 1,562개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 극장 수로 따지면 전체의 60%를 넘고 스크린 수로는 80% 이상을 잠식한 상황이다.

멀티플렉스는 매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지역에 따라서는 100% 이상 증가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은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지만 지방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멀티플렉스 신설 움직임은 그칠 줄을 모른다.

겨우 명맥을 이어온 지방 단관극장들은 스스로 멀티플렉스로 전환하거나, 아니면 부도 또는 폐업 위기에 직면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전국의 극장이 멀티플렉스화하고 있는 셈이다.

CJ, 롯데 등 대기업 자본이 극장산업에 뛰어드는 한편 영화 배급사들이 대량 좌석을 확보한 극장에만 블록버스터를 몰아주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멀티플렉스 득세의 결정적인 배경이다.

멀티플렉스의 공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는 “공략 지점이 남아 있는 한 대기업 자본의 극장 신설은 이어질 것”이라며 “지방 중소도시가 멀티플렉스에 장악되는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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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