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파워풀한 그녀의 목소리… 동시대 젊은이들 가슴을 휘젓다정부 선정 건전가요가 유신 반대 집회 계기로 금지곡 둔갑 해프닝

1970년 명동 YWCA ‘청개구리홀’에서 김민기와 양희은이 만났다. 이 환상적 콤비가 빚어낸 노래들은 대중음악을 뛰어넘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7,80년대 모든 시위 현장의 주제가였던 이들의 역작 ‘아침이슬’은 무대보다 거리에서 더 큰 힘을 발휘했다.

한국 포크의 대모 양희은의 첫 모습은 화려한 의상이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 머슴애처럼 청바지, 청 난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당당했고 상큼했다.

“노래의 사회성에 대해 처절하게 느꼈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스크럼 짜고 나올 때 부르는 저 노래가 내가 부른 노랜가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았다. 노래라는 건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의 뜻과는 달리 받아들여주고 되불러주는 사람의 것이라는 걸 절감했다.” 그녀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항 가수의 상징이 되었다.

1971년 봄, 대한일보 강당 무대. 공연이 끝날 즈음 김민기의 서울미대 동급생 김아영이 양희은에게 찢겨진 ‘아침이슬’의 악보조각을 건넸다. 그 조각난 악보를 테이프로 붙여 지금껏 간직할 만큼 그녀를 감동시킨 최초의 노래였다.

다운타운 최고의 여성노래꾼으로 떠오르자 1971년 6월 이해성, 신태성씨가 킹레코드에 그녀의 데뷔음반제작을 주선했다.

김민기가 멜로디파트를 맡고 장안의 화제였던 시각장애인가수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을 맡아 뚝섬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이용복은 “당시 김민기 곡을 잘 몰라 즉흥적인 애드립으로 따라갔다.

양희은의 참신하고 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나라에도 진짜 포크가 탄생한다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앞 광장에서 재킷사진을 촬영했다.

3곡의 김민기 창작곡과 김광희 곡 ‘세노야 세노야’ 그리고 명동 ‘오비스 케빈’에서 주로 불렀던 ‘일곱 송이 수선화’ 등 6곡의 번안 곡 등 총 10곡이 수록된 그녀의 데뷔음반은 3개월 후 세상에 나왔다.

처음 인기를 끌었던 곡은 ‘아침이슬’이 아닌 1집에 이어 연속으로 발매된 ‘71년 폭송 힛트모임 1집’ 수록곡인 김정신 곡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청아하면서도 힘이 실린 양희은의 맑은 노래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1973년 아름답고 시적인 ‘아침이슬’의 가사는 정부에 의해 고운 노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찬반 국민투표 날, 투표 반대 집회에서 그 노래가 시위대에 의해 불리어질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금지곡으로 둔갑을 했다. 당시 모든 대중가요 음반에 의무적으로 건전가요 한 곡을 넣기 시작했다. 금지곡 ‘아침이슬’이 건전가요 리스트에도 버젓이 등재되어 빚어진 해프닝은 웃지 못 할 시대의 코미디였다.

72년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74년부터 2년간 긴급조치망령이 아홉 번이나 퍼레이드를 벌였다.1집 수록곡 중 김광희곡 ‘세노야’와 번안 곡을 제외한 양희은이 노래한 모든 김민기 곡은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 ‘시의 부적합’, ‘허무주의 조장’이란 금지 사유가 붙여졌지만 ‘아침이슬’엔 아무 이유조차 없이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측의 인사를 암시한다는 억지 해석이 내려졌다.

‘작은 연못’은 정권을 비꼰다는 이유로 주홍 글씨 낙인이 차례로 찍혀졌다. 김민기곡이 아닌 양희은의 첫 히트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까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꼬투리로 주홍 글씨 낙인이 차례로 찍혀졌다.

지금까지 양희은이 발표한 노래 중 금지곡만 해도 무려 30여곡에 이른다.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그 노래들은 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소외된 노동현장에서, 국민들의 각종모임에서 더욱 질긴 생명력으로 시퍼렇게 불리어졌다.

특히 ‘아침이슬’은 각종 모임의 대미를 장식하며 참석자들에게 강한 연대의식을 안겨주는 마력을 발휘하며 세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양희은 1집은 최초의 ‘아침이슬’버전이 수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설이 되었고 한국 포크의 클래식 명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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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