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사생활의 자유… "None of your business"와 집단 돌팔매질

패리스 힐튼 자서전의 책 표지.
내가 가끔 찾아가 발음 교정을 받는 중년의 미국 아줌마가 있다. 엄청 깐깐하고 특이한 성격의 그녀, 만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나의 자존심을 무참히 구겨놓은 바람에 가능한 한 도움을 청하지 않고 지내기를 일 년여 만에 그녀를 다시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분위기 쇄신을 좀 해보려고 “너 그 동안 살 많이 빠진 것 같다” 며 내 딴에는 칭찬이랍시고 한마디 했더니 그녀의 반응이 장난이 아니다.

정색을 하고 따지는 것이다, “네가 그런 말을 할 만 큼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면서. 다시 말하자면 자기 몸무게 얘기는 제 삼자가 왈가왈부 할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쪘다’고 그 구박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온 나인데, 살 ‘빠졌다’는 게 뭐가 어때서...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뜻밖의 반응이 불쾌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 한국 사람은 만나면 신원 확인부터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예외 없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만나면 보통 다짜고짜 신원 확인부터 들어간다.

“몇 살이냐?” “어느 지역/ 학교 출신이냐?” “누구 누구를 아느냐?” 등등. 이런 개인적 신상 파악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다음 단계의 의미 있는 대화로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사생활 보호라는 개념은 생뚱맞게 낯설기만 하다.

"None of your business"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뜻) 란 말은 내가 여기 와서 처음 배운 몇 개 안 되는 필수생활영어 중 하나였다는 것이 시사 하듯이, 미국에서 개인 사생활의 자유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한국에 잠시 다녀오는 김에 내가 깜빡 했다. 아 나의 실수!

연예인에게 사생활의 자유가 있을까? 한국의 어느 인터넷 기사에서 누군가가 연예인은 공인이니 모범적인 사생활로, 예를 들면 이혼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사회의 역할 모델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게재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연예인은 “만인의 연인”으로 통한다는 점, 청소년들의 “연예인 따라하기/따라입기” 등에서 보여지는 연예인의 사회적인 영향력, 그리고 KBS 와 같은 공익 방송사가 징수하는 시청료의 상당부분이 연예인들의 출연료로 지불된다는 이치에 맞기도 하고 좀 안 맞기도 한 것 같은 아리송한 이유 등을 고려해 볼 때, 한국의 연예인이 공인인 것 맞기는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연예인은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요구되는 정치인과 같은 공인과는 분명히 성격이 다른 공인이다.

시청자들이 연예인을 만나는 것은 그들이 극중에서 연기해내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한 일종의 ‘간접’ 만남이라는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연예인의 실제 삶의 내용은 사실 따지고 보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아름다운 겉포장이 그녀의 속 내용과 일치 하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실망 심지어는 분노의 심정을 백분 이해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의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이건 이론적인 얘기이고 현실적으로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거의 예외 없이, 연예인에게 사생활의 자유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 매스컴의 연예인 다루기를 눈여겨보면 우리랑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 한번 걸려들면 눈물과 회한의 긴 세월

애인과의 섹스 비디오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통해 공개돼 곤욕을 치뤘던 호텔재벌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그 사건과 관련 TV 방송에 나와 인터뷰한 장면.

최근 방한해 우리 매스컴의 집중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은 미국 여배우 힐튼은 한때 과거 남자 친구와 찍은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는 바람에 난처한 지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런 훌륭한(?) 가십거리를 놓칠 미국 매스컴이 역시 아니어서 이 사실이 보도되기는 했었지만 한국 여배우 오모양 때려 잡기식의 집단 돌팔매질은 여기선 없었다.

심지어 미국의 어떤 유명 여배우는 힐튼의 비디오를 봤냐는 기자의 질문에 웃으면서 “She is hot!"- 섹시하다는 뜻으로 많은 미국 여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칭찬의 말 중의 하나이다- 이라고 재치 있고 너그럽게 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슷한 죄목(?) 에 너무나 엇갈리는 두 여배우의 운명. 이후 누구는 승승장구하고, 심지어 먼 나라 한국까지 가서 매스컴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또 누구는 어쩌면 자신의 전부이었을 연기 인생을 접고 눈물과 회한의 긴 세월을 보내야 했고.

이 극명한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까? 미국이 우리보다 성적, 도덕적으로 더 타락한 나라이어서는 분명히 아닐 터인데. 힐튼 비디오 사건에 대한 미국인의 관용, 개인 사생활 존중의 차원에서 보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남의 집 안에서 그것도 남의 은밀한 침실 안에서 일어난 일이 ”None of my business".

즉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미국인들에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사생활 존중의 법칙은 한국에선 사생활이 없는 공인 이라 여겨지는 연예인에게까지 비교적 차별 없이 적용되는 듯하다. 늘 시청자를 즐겁게(?) 하는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한 가십이 연예인 죽이기까지 가는 일 여기선 거의 없다.

■ 잔인한 악성댓글에 우는 스타들

한국에서 연예인 잉꼬 커플로 알려졌던 박-옥 커플의 이혼소송이 법정 공방으로 까지 이어지며 박씨 본인 말마따나 “진흙탕” 싸움으로 까지 번졌다. 소송까지 가는 과정이, 심지어는 부부간의 은밀한 일들 까지도 몽땅, 대중매체를 통해 생중계 되다시피 했고, 이에 반발한 옥씨 측이 “마녀 사냥”을 중지하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았다.

잘 잘못은 내가 따질 성격의 일도 전혀 아니고, 또 그럴 의도도 눈곱만치도 없지만, “마녀 사냥” 이라는 그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쳤다. 사실 그 동안 박-옥 씨 관련 인터넷 기사를 눈여겨 봐 왔었는데, 정작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기사 자체가 아니라 기사 끝에 사람들이 올린 악성 댓글 이었다.

사람하나 생매장 하기가 이리 쉬운 일이구나 느껴질 정도의 험악하고 잔인한 독설의 직격탄 들이 특히 여성인 옥 씨에게 퍼부어지는 것을 보았다.

여기 미국에서는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양육권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연예인 스캔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질 낮은 타블로이드 잡지는 물론이고, 매일 아침 방영되는 TV의 아침 뉴스쇼까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 하다시피 하고 있다.

즉흥삭발과 같은 돌발행동, 스타와의 뜨거운 하룻밤을 떠벌리는 고약한 하루살이 남자친구와의 인터뷰, 밤을 낮같이 지새우는 흥청망청 파티, 주차장에서 남의 차 받고 줄행랑하기, 자기 아이들 키우는 집안에서 옷 벗고 돌아다니기, 습관성 약물 복용 의혹 등등, 다뤄졌던 내용도 참 다양하다.

“바른 생활” 과는 거리가 먼 듯 한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낱낱이 보도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옥 씨에게 쏟아졌던 것과 비슷한 그런 험악한 악성 댓글을 적어도 나는 아직 발견 못했다.

“당신 노래 그것 밖에 못하냐?” “그 실력으로 어떻게 첫 음반이 성공 했나 모르겠다!” 는 등등의 그녀의 가수로서의 본질에 대한 비난은 많이 읽었지만 말이다. 연예인이 주는 환상과 실제를 구별할 줄 아는, 그래서 그들의 사생활도 존중 되어야 한다고 믿는 듯한, 많은 미국인들의 성숙한 연예인 사랑이 부럽다.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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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그녀의 남편 케빈 페덜라인. 이들의 이들의 아들 숀 프레스톤을 특집으로 다룬 피플 잡지 표지.

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