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세계에 갇혀 소재 고갈… 관객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자생력 키워야출구없는 좌절감 모티프로 한 청춘영화서 벗어나… 시대의 아픔을 정면 돌파하는 청년영화에 관심을

영화감독이 영화 이론에 밝기는 어렵다. 반대로 뛰어난 이론가가 뛰어난 감독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은 짧은 영화역사에서 검증된 바 있다. 창조된 작품과 산출된 이론 사이에서 전자가 후자에 못 미친다고 생각되면 많은 현장 비평가들이 영화 제작에 뛰어들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일군의 영화평론가 출신 감독들이다. 고다르와 튀르포는 만년필 대신 카메라를 들고 영화 현장에 뛰어들어 카메라로 새로운 영화미학을 써내려갔다. 보기 드물게 자신의 영화 세계를 미학적 논리로 완성한 에이젠슈타인과 타르코프스키도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자신의 연출 노트에서 영화감독에 대해 아주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감독이란 “영화 제작의 담당자이며 백과사전적 지식을 몸에 지닌 새로운 예술적 표현 수단의 풍부한 건반을 연주하는 예술가”이며 “사색하는 예술가, 혁명적인 예술가, 새로운 길의 개척자, 지칠 줄 모르는 탐구자, 그리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지혜와 감정을 촉진하며 대중을 인도할 수 있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다.

가히 감독은 예술가이며 대중의 인도자로서 격이 높은 자리에 서 있게 된다. 영화 감독은 당대의 문화를 두루 포섭하여 작품의 꽃으로 피어내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영화에 재현된 감독은 제작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실어증에 걸리거나(은하해방전선) 영화대신 에로 비디오를 찍다가 겨우 감독 데뷔하거나(색화동) 기자재도 제대로 빌릴 수 없고 연애도 실패해 영화인으로서 고군 분투하는(아스라이) 한국사회의 타자 중의 타자이다. 이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부인하기 어려운 한국 독립영화 감독의 맨얼굴이며 영화 제작의 현주소다.

‘한국독립영화 감독은 사회적 부적응자’라는 각인 작업이 그들의 영화를 통해 동어 반복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심각한’이라는 형용사를 극구 덧붙인 것은 폐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독립영화는 영화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기 같은 시네다이어리적 제작 태도에 함몰되어있다. 영화가 영화인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천편일률적으로 사생활을 복사하는 것은 리얼리티를 살린다는 미학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영화의 자기 연민적 태도다.

영화하는 이들의 일상과 고민을 날 것으로 잡아내는 것은 일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문제는 영화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우리사회에 소수라는 점에서 관객의 제한을 초래할 것이다.

독립영화가 개봉관 마련 문제와 관객 개척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겨놓은 상황에서 영화인을 소재로 자기 속옷 드러내기 식 이야기와 자조적 태도에 함몰하는 것은 관객 축소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

또한 보다 폭넓은 소재와 미학적 시도가 요구되는 독립영화판에서 영화인 소재에 함몰함으로써 소재고갈과 아마추어리즘의 지배라는 문제를 파생하게 된다. 아마추어리즘과 미학적 실험은 예술과 퍼포먼스의 차이와 같다.

대학의 제작 실습 강의는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저학년과 고학년이 같은 학교를 다니지만 시나리오 소재에 차이를 드러낸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저학년은 주로 자신이 경험했던 기억의 영화적 재현에 집중하며 고학년으로 갈수록 자신이 하고 싶은 보편적인 테마를 영화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에 몰두한다. 저학년의 태도는 자신의 경험과 생활에 소재가 함몰되어 있으며 고학년이 될수록, 즉 성장할수록 소재와 주제의 폭이 넓어진다.

영화는 소수가 공감할 소재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대중적 장르 정체성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청춘영화의 양산과 시네다이어리적 소재는 독립영화의 소재 고갈과 자기 세계 함몰이라는 반성할 과제를 던져준다. 윤성호의 <은하해방 전선>은 단편영화 작업부터 시도해온 자기 반영적 태도로 인해 영화 감독을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 만드는 일의 어려움을 희극적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공자관의 <색화동>은 스스로 에로비디오 감독 출신이라는 자의식을 영화 속에서 그대로 활용하여 에로비디오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흐리게 했으며 시네다이어리적 태도를 드러냈다.

김삼력의 <아스라이> 역시 주인공이 감독 자신의 분신처럼 닮아있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자전적인 요소와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하며, 영화 서사 진행 방식도 영화 입문기부터 영화 작업에 이르기 까지 성장과정이 점프 컷으로 진행된다.

조영각은 “<아스라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영화를 통해 성장해가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솔직한 성장영화이자, 독립영화 만들기에 관한 고난의 보고서”로 평가했다.

<아스라이>는 작품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장편영화 소품 비용으로 제작된 영화’라거나 ‘악전고투로 영화 만드는 이들을 보여준 영화’라는 제작관련 에피소드에 평가가 집중된다.

감독은 “승자 독식의 룰을 깨고 모두가 그 행복을 얼마간 나눠 가질 수 있기 바란다”는 희망사항을 피력했다, 영화를 감상한 한 사람의 관객인 필자는 그들의 말이 하나의 잡음처럼 웅웅거렸으며 동의하기 어려운 요구사항이었다.

심지어 <아스라이>에 대한 평가나 작품에 대한 항변이 영화적 실패를 무마하려는 찬란한 수사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김삼력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너희는 꿈이 없느냐?”라고 묻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필자는 꿈이 있다. 필자의 작은 꿈은 한국 독립영화 관객 개척과 독립영화 자생력 기르기라는 꿈이다.

김삼력의 <아스라이>는 한국 독립영화의 총체적 난맥상을 집약하고 있다. 이 영화는 지방의 영화인이 장비와 스텝 부재와 시스템 편입에 실패하면서 고군분투하여 영화의 변방에 닻을 내리는 자전적 이야기다.

독립영화인들에게는 자기성찰적 영화로 익숙하게 받아들여질 소재다. 하지만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에 대한 강조와 청춘의 우울한 초상을 클로즈업하는 청춘 영화로의 매몰 등 모든 영화적 패배를 제작환경의 열악함에 돌려 면죄부를 받으려는 식의 태도는 불편했다.

필자는 한국독립영화가 관객과의 소통 성공과 독립영화 전용관의 성공적 운용 등을 통해 산업적 자생력을 갖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 독립영화의 산업적 자생력은 배급과 관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업영화보다 더 주목할 만한 독립영화의 발견과 출현에 있다.

독립영화는 주인공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청춘영화에 머물고, 영화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재의 고갈에 비틀거리고, 장면과 장면의 연결에서 가장 기본적인 연속성의 룰조차 아무런 이유 없이 폐기될 때, 스스로 위기를 자초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관객의 외면이다.

독립영화인들은 영화만들기의 괴로움의 전시도 중요하지만 영화란 무엇인가, 독립영화란 무엇인가의 화두부터 길게 붙들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제 한국 독립영화는 출구 없는 좌절감을 모티프로 하는 청춘영화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 시대의 아픔과 우리시대를 돌파할 비판 정신으로 무장된 청년영화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청춘영화는 청년 영화로 성장해야 한다. 이 명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제기해준 작품이 바로 <아스라이>다.

■ 문학산 약력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현 세종대 강사, 영등위 영화등급 소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저서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예술영화는 없다><한국 단편영화의 이해>. 영화 <타임캡슐 : 서울 2006 가을>, <유학, 결혼 그러므로 섹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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