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계층에 대한 유별난 언어적 배려… 미국인의 성숙한 시민의식 돋보여

토론 위주의 세미나 수업이 대부분인 미국 대학원 수업.
강산도 변한다는 십여 년간을 미국에 살면서 이곳에 말뚝 박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필자가 혹시라도 이곳에 주저앉으려 시도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자유'에 대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 무려 네 번에 걸쳐 귀한 지면을 투자해서 얘기해왔는데, 정작 가장 기본적인 ‘말하는’ 자유에 관한 것을 쏙 빼먹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왜 그랬을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의미있을 이유를 캐내자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유학생활 십년이 무색하게도 ‘말(영어) 완전 정복’을 향한 투쟁을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는 내 처지에, 말의 자유란 것이 선뜻 마음에 와 닫지 않았다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귀머거리 이년 벙어리 삼년’의 매섭고, 긴 유학생 초년 시집살이 얘기를 좀 해야겠다. 유학 첫 해, 교수님들 강의는 그럭저럭 알아듣겠는데 미국 아이들이 중구난방 떠드는 것은 도통 못 알아 들었다.

나 빼놓고 무슨 엄청 중요한 얘기를 하나보다 지레짐작하며 절망이 깊어 가던 어느 날, 한 미국 여학생이 마구 신나게 떠들다가 갑자기 헷갈린다는 표정을 짓더니, “참 이건 다른 수업 시간에 배운 거지!” 하는 것이다. 이 웃긴 여학생 덕에 쌓였던 오해를 풀고 “뭐 대단한 얘기들 하는 건 아니었구나!”하는 편한 마음으로 토론수업에 갈 수 있었다.

유학 생활 삼 년째, 강의도 토론도 다 들을 만한데, 입이 도통 떼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어쩌다 나도 한마디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먼저 머릿속으로 완벽한 문장을 연습하는 사이 대화 주제는 이미 다른 것으로 옮겨가 끼어들 시기를 놓쳐버리기 일쑤이었고, 게다가 심약한 내가 뭔가 말해보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가빠져오며 십분 정도는 그냥 까먹기가 예사라 ‘참여점수 반영’ 이라는 실질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미국 학교에서의 삼 년간을 자진하여 반벙어리 신세로 지냈다.

■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 독선 부리면 '왕따'

미국 대학생 수준의 학생들을 일 년간 무사히 가르친 경력을 쌓은 직후인, 그래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관한 자신감이 조금 생긴 지금에서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엔 정말 괴로웠다.

특히 책도 안 읽고 온 미국 학생들이 아는 척하고 떠드는 것을, 책을 다 읽고 온 내가 하나도 모르는 척하며 조용히 앉아있었을 때는 말이다. 영어가 조금 되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유를 주저 없이 행사할 수 있는 지금에서야 진정한 미국식 의사표현 자유의 의미를 만끽하고 있다.

아까 말한 웃긴 미국 여학생 얘기에서 조금 눈치를 채셨겠지만 미국의 대학원 수업은 참으로 자유롭다. 어떤 얘기를 해도, 내가 듣기엔 별로 시답지 않은 얘기들 까지도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다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주는데, 단 한 가지만 용납이 안 된다.

자기 의견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우기는 경우. 모든 문제에 한 개의 정답만이 있는 ‘사지선다’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 유학생분들 멋모르고 토론에 ‘혈기’ 내다가 ‘왕따’가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봐왔다.

■ 노인은 시니어시티즌, 불체자는 서류없는 사람

주로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최근 한국 소식을 읽은 후 한 가지 소감을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있는 ‘막말’에 자유로운 나라라는 것이다. 이미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인터넷의 인신비방성 댓글이 한 예이고, 선거철이면 예외 없이 나도는 선전선동용 흑색 비방은 다른 예일 것이다.

또 막말을 전략 삼아 튀었다는 개그맨 김 모씨의 욕설을 동반한 여성비하성 발언 (주간한국 2007 년 12월 4일자 기사), 그리고 여권운동 하는 한국의 ‘언니네’가 “2007년 꼬매고 싶은 입”으로 선정한 한국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여성이나 장애인 등을 비하하는 말 (한겨레신문 2007 년 12월 13일자 기사) 등은 나의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과 같은 ‘공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종류의 막말, 이곳 미국에서는 심하면 그 말을 한 사람의 직업생명을 끝냈을 수도 있는 심각한 범죄(?)로 취급된다.

미국에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 (Political Correctness) 라는 개념이 있다. 직역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정도 되는데, 이 말의 실제 쓰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정치와는 거의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들 특히 사회의 비주류나 소외 계층인 여자, 동성애자, 유색인종, 지체 또는 정신 장애인, 비만인 등이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는 언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 정도로 이해 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Negro" 즉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깜둥이“ (죄송!) 정도 되는 이런 인종 비하성 발언은 여기선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흑인” (Black) 이란 말도 “N"자 들어가는 말보단 백번 낫지만 바른 말은 아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African-American) 이라는 말이 가장 정치적으로 옳다고 한다.

피부가 까맣다는 이유 하나로 “깜둥이”라고 부르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 분들이 많은데, 만일 저들이 우리말을 알아 듣는다면? 휴! 아찔하다.

이런 종류의 꼬리표 다는(labeling) 말 중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 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노인” (old people) 이란 말보다는 “시니어 시티즌” (Senior citizen) 이란 말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하는데, “시니어 시티즌” 이란 말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후 명예롭게 은퇴한 사회 선배 또는 성숙한 시민 등으로 이해한다면 “노인”이란 말보다는 백배 천배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할 것이 틀림없다.

다른 예는, “불법 체류자” (Illegal Immigrant) 라는 말 대신, “(이민)서류가 없는 사람” (Undocumented) 이란 말을 쓰는 것인데 미국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계층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배려하는 정신이 돋보이는 말이다.

한데 “정치적으로 바른 말”을 골라 하는 것 쉽지 않다. 예를 들면, “귀머거리” (Deaf) 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은데 ”벙어리“ (Dumb) 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단다.

하도 헷갈려서 한 미국 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벙어리란 말은 사용되어오는 과정에서 “멍청한” 이라는 부가적인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란다. 자유로운 대학원 수업시간을 통해 엿볼 수 있었듯이, 하고 싶은 말하는 자유가 비교적 잘 보장되는 듯 한 미국, 하지만 한국식의 막말하는 자유, 적어도 공인에게는, 없다고 봐야겠다.

물론 막말 했다고 감옥 가는 일은 없지만, 몇 달 전 인종 비하적인 멘트를 날린 한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가 시청자의 압력으로 프로그램에서 도중하차 당하는 것을 봤다.

■ '한국식 막말' 들으면 개인의 인격 의심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를 “문화적 공산주의” (Cultural Marxism)에 비교하며,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 말하는 자유를 잃게 만든 억압적인 제도라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리는 미국 사람들도 물론 있다.

아쉬울 땐 자기들도 이 개념을 써먹지만 말이다. 한국의 막말하는 분들은 생각 있는 미국인들의 남을 향한, 특히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 박는 계층을 향한, 좀 유별난 배려들을 조금이나마 배웠으면 좋겠다. 말은 개인의 인격과 사회의 품격을 가름하는 잣대이다. ‘한국발’ 막말을 들을 때마다 지금 우리 한국사회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심히 걱정이 된다.

■ 나종미 약력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

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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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