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19 그리고 80'

자꾸만 죽고 싶어하는 자살 충동증의 19세 엽기청년. 반면 어떤 초라한 현실에도 무한히 낙관적이고 발랄한 80세 할머니. 이 청년과 할머니가 사랑에 빠진다. 가능할까? 그래, 불가능하리라는 법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의 잠재력을 흔들어 깨워주는 이에게 끌리게 돼 있으니.

한 미끈한 청년이 튀어나와 잠시 노래를 부르고 목을 매달면서 뮤지컬 <19 그리고 80>이 시작된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연일 만석 행진을 잇고 있는 화제작이다.

청년의 어머니가 나타나자 아들 해롤드는 ‘교수형 놀이’를 중단당한 채 된통 야단만 맞고 사라진다. 내내 자살 궁리만 하는 해롤드는 젊은 어머니에게 대단한 골칫거리다. 얌전하거나 야성적인 다양한 맞선 상대를 구해 줘 보지만 아들은 오히려 엽기행각으로 상대를 쫓아낸다.

그러다 우연히 동화처럼 모드라는 이름의 할머니를 만나면서 청년의 엽기는 파워를 잃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해롤드의 모든 기괴한 행각을 따뜻한 시선으로, 생기발랄한 우정으로 감싸안으며 서서히 마음 속 숨은 에너지와 자기애를 끌어낸다.

나이차가 무려 약 60세. 둘은 함께 차를 훔쳐 타고 나무를 심으러 가기도 하고, 높직한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할머니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후 혼자 살면서 숱한 고생과 죽음의 유혹, 고통을 건너 온 뒤다. 심지어 자신의 집이 압류당해 거리에 나앉게 된 상황에서도 ‘새로운 변화 또한 멋진 경험’이라며 천진한 소녀처럼 웃는다.

이 범상치 않은 할머니에게 19세 청년은 사랑을 느끼고, 청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청혼 겸 사랑의 고백을 아로새긴 반지를 준비 해 간 할머니의 80세 생일날,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다.

공연에서 단연 최고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할머니 모드 역으로 등장하는 중견배우 박정자다. 다소 위압적이리만큼 엄숙한 여제(女帝)형 카리스마로 자리한 그의 고정화된 명성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아기자기하고 천진난만한, 그러나 남다른 자유의 철학을 지닌 노인으로 변해있다.

박정자가 연기하는 모드는 할머니가 된 <모모>와 <모리스와 함께 한 화요일>의 ‘할머니’ 모리스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그의 관록이란 과연 허언이 아니다. 연기의 디테일은 물론, 심지어 고유의 발성조차 바꾸는 등 시종 감탄을 자아낸다.

장두이 연출과 함께 뮤지컬계의 스타인 서지영, 이건명, 배해선 등 내노라하는 국내 명배우들이 조연으로 대거 동반 출연, 신예배우 해롤드 역의 이신성 등 화려한 출연진도 소극장 공연작으로서는 흔치 않게 만나는 경우다.

<19 그리고 80>의 원작은 미국의 작가 겸 영화감독 콜린 히긴스의 컬트영화를 모태로, 연극과 뮤지컬로 다양하게 변환돼 왔다. 국내 무대에서는 1987년 연극으로 첫 선을 보였고, 2003년 공연에서는 박정자 주연으로 특히 큰 반향을 얻었다.

이후 박정자의 ‘모드’역은 이번이 네 번째. 공연의 부제 그대로 <박정자의 뮤지컬>답다. 보너스로, 극중 ‘모드’를 통해 흘러나온 명언 몇 대목을 선사한다.

“(해롤드, 모드가 건네 준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머뭇대며) 그런데 어쩐지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요”“나쁜 짓, 좋은 짓, 그런 이분법에 빠지는 건 좋지 않아. 그런 식의 이분법은 우리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뺏아갈 수 있거든.” / “(자신이 준 사랑의 반지를 받고 기뻐하던 모드가 갑자기 반지를 던져버리자 해롤드가 놀라서) 아니, 왜...?”“이래야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거야.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이제 반지는 영원히 내 안에 있어.”“안돼요. 전 이해가 안 가요.”“알아, 그걸 이해하는 덴 좀 시간이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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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