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용우 지음 / 역사비평사 발행 / 1만3,000원

며칠 전 ‘역사의 상처’라는 제목의 만화 한 토막을 한 중앙일간지에서 보았다.

이 만화는 “세계 각국은 역사의 상처를 갖고 있으며 외국인이 그들에게 그런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라면서, “우리에겐 일제 치하 36년간의 식민 지배 경험이 가장 큰 역사의 상처로 남아 있고, 이 상처는 아직도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 정말 지겹게도 아픈 데를 후벼 파는 이들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과거사 캐기, 친일 분자 색출 응징,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를 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이제 과거는 덮어두고 미래 지향적으로 살자며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역사 의식을 갖지 말자’고 주장하는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이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세계 역사 만화를 그려 명성과 부를 거머쥔 작가와 동일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과거사 청산이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라고 말했지만,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 진상 규명조차 제대로 안 된 나라에서 과거를 그냥 덮어버리자는 얘기가 오히려 대한민국 정체성을 흔드는 짓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이렇게 일제시대라는 한국 역사의 한 부분을 영원히 땅 속에 파묻어 버리자는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한 권 나왔다. 항상 우리가 과거사 청산에 대해 말할 때 ‘모범 사례’처럼 거론하는 프랑스에서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 쓴 연구서다.

2차대전 직후~1950년대 초까지 드골의 임시정부는 프랑스의 대독협력자 숙청을 진행했다. 책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약 35만명(당시 프랑스인 116명 중 1명 꼴)에 대해 서류 검토가 있었고 이 가운데 12만명이 재판을 받아 9만8,000명이 실형을 선고 받고 3만8,000명이 수감됐다. 1,500명은 정식 재판 후 사형됐지만 8,000~9,000명은 재판 없이 처형됐으며 2만명의 여성 부역자들은 삭발을 당했다.

이렇게 간단한 숫자만 몇 개 나열해 봐도 당시 프랑스의 숙청이 얼마나 단호하고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철저한 과거청산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던 안병직 교수나 전후 프랑스에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부역자들을 단죄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 복거일 씨는 저자가 프랑스 고서점에서 1차 사료까지 꼼꼼히 찾아가며 쓴 이 책을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을 한국의 모범으로 삼는 데 대해 반대하는 이들의 또다른 논리는 프랑스와 한국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겨우’ 4년 동안 독일의 지배를 받았지만 한국은 36년이나 일제 식민지였다는 것. 하지만 프랑스라고 해서 독일 협력자들을 무 자르듯 쉽게 가려내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은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식민지였던 반면, 프랑스는 수많은 식민지들을 독일에 빼앗기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갖고 있었고, 단순한 ‘괴뢰정부’라고 치부할 수 없는 ‘비시 정부’가 있었다. 따라서 이 정부에서 일한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공무원 등 ‘단순’ 복무자도 모두 단죄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거의 절반은 40년대 말~50년대 초의 숙청 기간에 벌어졌던 일들을 사실적으로 고찰하고, 두 번째 부분은 반세기 만인 90년대에 새롭게 밝혀진 과거 독일 협력자들에 대한 ‘반인륜범죄’ 재판을 다룬다.

마지막 부분은 이 과거 청산 과정이 실제 프랑스인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았는지를 고찰한다.

세 번째 부분이 흥미로운데, 현대 프랑스인은 해방 직후의 숙청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살인자에게도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현재와 달리 과거사 청산 때 친척이나 지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는 사실은 아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프랑스의 드골 정부가 이 과거사 청산을 통해 정통성을 부여 받았고, 결과적으로 프랑스라는 국가가 권위주의적, 인종주의적 체제에서 공화주의적, 민주적 체제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말한다. 한 국가가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려면 과거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낱낱이 밝힌 후에 가능하다는 것을 프랑스의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