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당하고 피살된 딸, 그리고 복수하는 아버지 그린 미스터리 형식의 사회비판 소설■ 방황하는 칼날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이선희 옮김 / 바움 발행 / 1만2,000원

2004년 밀양.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겨우 13, 14세의 여중생 자매가 무려 40여명의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희대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피해 학생은 학교들의 전학 거절로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 가출까지 한 반면, 가해자 중 5명이 겨우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을 뿐이며 나머지 학생들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 지난해 방송사의 추적 보도로 드러났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 미성년자들의 집단 성폭행은 대형 뉴스로 다뤄지지도 않을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 형법 적용대상이 아닌 만 14세 미만 가해자들의 경우 별다른 훈계조차 받지 않고 풀려나는 사례도 벌어진다.

집단 따돌림과 성폭력, 신체적 폭력 등 미성년자 범죄는 일본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다.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신작 <방황하는 칼날>에서 ‘소년범죄’에 주목한다.

가해자가 어른이라면 종신형이나 사형까지도 선고 받을 수도 있는 성폭행과 살인이라는 강력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단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최대 2~3년을 소년원에서 보내게 될 것이 확실한 경우, 피해자의 가족은 분노를 그냥 삭혀야만 하는가.

소설 속의 주인공 나가미네는 ‘복수’를 선택한다. 아내와의 사별 후 금지옥엽처럼 키워 온 외동딸 에마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된다. 익명의 제보자의 말에 따라 범인의 집에 가 본 나가미네는 두 명의 범인에게 딸이 무참히 성폭행 당하는 비디오를 본 뒤 우연히 들어온 범인 중 한명을 순간적 충동으로 죽여버린다.

이어 나머지 한 명의 범인 가이지도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관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엽총을 사 들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도망 다니면서도 “자수한다고 해도 좀더 신나게 즐긴 다음에. 경찰에 잡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일말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 가이지를 보호하기 위해 나가미네를 지명수배하고 찾아 다니는 경찰이다.

만약의 경우 나가미네를 쏘기 위해 총구를 겨눈 경찰관 오리베는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라고 마음 속으로 묻는다.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인가, 묻는 작가의 목소리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 <용의자 X의 현신>에 비해 <방황하는 칼날>은 주제도 무거울 뿐 아니라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재미도 덜한 편이다. 하지만 과연 ‘아버지의 복수’가 이뤄질 것인지, 익명의 제보자는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순식간에 읽히고, 전혀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다뤘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작품을 읽으며 9년 전 충격까지 느끼며 읽었던 일본 작가 텐도 아라타의 소설 <영원의 아이>를 떠올렸다. 작가는 어린아이에 대한 가족의 성폭력과 학대라는 사회문제를 역시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 놓는다.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할 뿐 아니라 곳곳에 단서를 흘리고 사건의 실체를 추적해 나가는 장르소설 특유의 구성도 완벽해 1999년 한국어판 출간 당시 1,200페이지의 꽤 긴 분량이었는데도 잠시도 손에서 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했었다.

<방황하는 칼날>도 수작이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메시지 전달’에 치중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영원의 아이>는 독자들의 허를 찌르는 기막힌 반전의 재미까지 주어 한수 위라는 생각이다.

현재 절판됐는데, 일본 문학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의 사소설이 인기였던 9년 전에 비해 요즘에는 다양한 장르와 작가들의 일본 소설이 사랑 받고 있는 만큼 재발간을 기대한다. 또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인간 개개인과 사회 전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력까지 겸비한 완성도 높은 장르소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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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