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이중계약으로 제작비 상승… 제살깎기식 출혈 경쟁 치열해져일부 업체 베스트셀러 재출간으로 무임승차… 특정장르 편중도 문제

대형 마트 내 서적 코너에 가면 어른 손 바닥만한 크기에 가격도 다른 책들보다 훨씬 저렴한 책을 볼 수 있다. ‘핸디북’이라고 하는 일종의 문고본 형태의 서적으로 최근 출판시장에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9월 신세계 이마트에서 처음 선보인 핸디북은 출시한지 한 달도 채 안돼 전국 점포에서 하루 4,000권 이상 팔려나가며, 6개월 만에 4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뒤이어 핸디북 사업에 뛰어든 롯데마트도 월 6,000만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대형 유통 업체들이 핸디북 덕을 톡톡히 봤다.

핸디북의 파급력이 커지면서 이제는 유통업체뿐만 아니라 단행본 출판사들과 대형 서점들도 본격적으로 핸디북 제작, 판매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출판 시장에서 ‘핸디북 전쟁’이 진행되는 양상이다.

핸디북의 전성기는 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핸디북은 문고본의 형태로 서점가를 풍미했다. 당시만해도 삼중당문고, 서문문고, 을유문고 등과 같이 문고종수만 200종이 넘는 출판사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점차 컬러화하고 고급화한 단행본에 밀려 문고본은 서서히 독자들로부터 멀어져 갔고, 결국 90년대 와서는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가 됐다.

문고본의 위기와 관련해 <책세상>의 김광식 주간은 “1987년 국제저작권협약(UCC)에 가입한 후 저작권과 출판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해외저작물을 무단으로 사용하거나 문예물을 2차 가공해 문고본을 만들던 관행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문고본 시장이 위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던 문고본 시장이 지난해부터 ‘핸디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각광 받기 시작했다. 이는 핸디북이 독자 저변을 확대하고, 그 동안 부풀려진 서적의 가격거품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핸디북의 부활을 놓고 그 역기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국내 출판시장이 포화상태인데다 아직까지는 양장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다시 핸디북 같은 문고본이 새롭게 부상하게 되면 출판시장이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시장을 잠식해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 한 출판사 대표는 “문고본이 활성화되면 해외처럼 저자와 이중계약을 해야 해 제작비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제 살 깎아먹기 식의 출혈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출판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스테디셀러를 모두 값싼 문고본으로 만들어 팔면 일시적으로 매출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출판시장의 침체를 불러올 것이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출판사의 주간은 “과부하한 출판시장에서 저가 문고본의 대세가 출판사의 출혈을 야기하고 있고, 초판 출간 때부터 양장본으로 낼지, 문고본인 핸디북으로 낼지 고민만 더 늘어났다”고 밝혔다.

현재 사정이 어려운 출판사들은 양장본과 문고본으로 이중출간하기가 힘들 뿐더러, 작가가 여러 출판사와 계약하게 될 경우 상당비용을 투자해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놓았지만 문고본의 인기를 등에 업은 다른 출판사에게 모든 공을 고스란히 빼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밖에 핸디북의 시장점유율 확대를 마냥 반기기에는 서점가의 상황도 녹록한 편이 아니다. 오프라인의 한 서점 관계자는 “그 동안 양장본과 문고본을 이중으로 내기 힘든 출판사 사정을 고려해 문고본을 적극 고려하지 않았다”며 “상당한 비용을 들여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더니 대형 유통업체나 출판사가 끼어 들어 무임승차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핸디북은 작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만 일부 특정 장르에서만 핸디북이 제작돼 장르가 편협하다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핸디북은 대부분 베스트셀러 위주로 한정돼 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외면 받기가 십상이다. 또 양장본과 문고본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함으로써 이중가격 부담과 구입 시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이에 전문가들은 작은 책, 알찬 내용,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연속성 이라는 문고본의 4가지 특성을 충실히 지키되 무엇보다도 독서 인구를 늘리고 출판 시장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문고본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지금껏 책 값을 비싸게 매긴 뒤 이런저런 구실로 깎아주곤 했던 관행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며 문고본의 적절한 운영과 안정적인 시장 정착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삼성경제연구소 임진택 출판팀장은 “양장본과 문고본의 책을 확실히 구분해 출간하는 출판계의 자정 노력을 통해 독자에게 알맞은 책을 공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핸디북의 제2전성기를 계기로 앞으로 출판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점쳐지는 가운데 오는 4월 1일부터 민음사, 김영사, 해냄 등 국내 메이저급 출판사들을 비롯해 50여 개 출판사가 참여하는 ‘2008 보급판 문고본 대전’이 두 달간 7개 대형 서점에서 동시에 열릴 예정이다.

■ 핸디북

핸디북은 기존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의 판형을 가로12 * 세로17cm 정도로 줄이고, 책 값을 정가의 60% 수준으로 내린 책이다. 규격은 문고판(10.6 * 14.8cm)보다 조금 큰 크기다. 보통 손바닥 만한 크기로 들고 다니기 편한 책의 판형으로 문고본이나 페이퍼백, 포켓북과도 같은 맥락이다.


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