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와 오바마 경선의 숨은 방정식… 잘못 말하면 '차별주의자' 굴레

오바마의 자서전 2권을 모두 읽었다는 오바마 열성팬 에이프럴이 오바마이어야만 하는 그녀의 세 가지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
미국에서 종교나 정치 이야기는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금기’로 여겨진다 한다. 워낙 ‘휘발성’ 이 강한 주제이다 보니, 이런 유의 얘길 하다가 언성 높일 일이 생길 수 도 있다는 것.

민주당 경선 주자인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에 관련된 정치얘기는 또 다른 이유에서 조심스런 주제인데, 이유인즉 둘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다른 하나를 깎아 내리다가, ‘인종 차별주의자’ 또는 ‘성차별 주의자’라는 공포스런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 민감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민망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좌석 순서를 기다리면서 마침 옆에 있던 50대 중반 쯤 돼 보이는 백인 아저씨에게 “미국 백인 남성들이 힐러리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퉁명스럽게 “나는 공화당원이다”며 쏘아 붙이는 것이었다.

거기서 ‘얘기 끝’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힐러리는 여러모로 훌륭한 후보이지만, 백악관 시절에 남편 클린턴과 연루된 스캔들로 인한 짐이 너무 많다”고 말을 더하기에, 그 짐이 구체적으로 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저씨 얼굴이 귀까지 벌게지면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얼굴을 돌리는 것이었다.

뭐 저리 언짢아 할 것까지 있을까, 당황스러움에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야 내 첫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 남성”이 여성후보 힐러리를 싫어한다는 나의 전제가 미국 백인 남성들은 성차별주의자라는 암시적인 ‘비난’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힐러리의 경험

일전에 힐러리가 “킹(Martin Luther King)목사의 인종 평등에 관한 비전은 훌륭했지만 그 비전이 정작 결실을 맺은 것은 존슨 (Lyndon B Johnson) 대통령과 같은 경험 많은 지도자가 시민 권리 법 ("The Civil Act of 1964")에 사인했을 때”라고 말했다가, 이것이 인종문제로 비화되어 흑인 표를 잃고, 당시 까지 중립을 지켜오던 민주당 실세 테드 케네디 (Ted Kennedy)의 등도 돌리게 만든 적이 있다.

‘비전’을 주는 ‘흑인’ 지도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킹”목사 후계자 정도로 여겨지는 오바마를 눌러보려는 속셈으로, 비전보다는 경험이라고 주장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얼마 전에는, 힐러리의 캠페인 멤버 중 하나인 페라로(Ferraro)라는 여자는 “오바마가 흑인 남성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일등 경선 주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 이라는 말을 했다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이틀 안에 바로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그후 오바마가 다니는 교회 (전)담임목사 (Rev. Jeremiah Wright, 이 사건 직후 은퇴함)가 인종차별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이 나라는 “저주받을 미국” ("God damn America”) 이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 그런 목사의 교회를 다니고 목사와 무려 20 년간이나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오바마도 ‘인종 차별주의자’나 ‘분리주의자’ 또는 ‘반국가적’인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휩싸였인 적이 있었지만 힐러리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선서한 대의원)득표 상으로 열세에 몰려있는 그녀에게 기사회생의 확실한 한 건이 터진 것이었으나 이 사건 관련 기자들의 질문에 힐러리는 “오바마에게 직접 물어보라” 며 비교적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리한 힐러리는 인종시비에 끼어들면 손해만 보는 장사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 것이다.

■ 표현하지 않는 지지자들

오바마와 힐러리 중 누구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모르쇠”를 연발하며 어색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던 미국 사람들. 인터넷 선거관련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을 읽어봐도, 다들 ‘정책’ 또는 ‘인간됨’ 등등 때문이라고만 하지, 오바마가 ‘흑인’이라서 또는 힐러리가 ‘여성’이라서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니 변변한 물증도 없이 심증만 가지고 뭐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인종에 따라 특정 후보 지지를 표명하는 ‘투명도’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흑백남녀를 가리지 않고 지지의사 표현에 있어 비교적 거리낌이 없는 편이다. 특히 오바마 지지 흑인들은 남녀 모두, 열에 일곱은 왜 오바마이어야만 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손으로 꼽아가며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다.

유력지 신문기사나 인터넷에 개인이 올린 글들을 보면, 안티-오바마 세력도 만만치 않지만, 자기를 노출 시켜가며 오바마를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백인들을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본적이 없다. 이들의 침묵이 먼저 언급한 ‘공포의 타이틀’과 상관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캐물어 볼 수는 없었다.

한편, 인종과 성에 따른 선택 사이에서 갈 길을 모르는 흑인 여성들도 꽤 많다고 한다.

평소 여성권익 옹호의 선봉에 서던 TV토크쇼의 여왕 오프라는 오바마 지지를 공개선언한 후 선거유세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일부 여성 팬들로부터 “배신자” 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선거 ‘후반부’로 접어들면서(최근 통계 근거) 많은 흑인여성들이 ‘오프라의 선택’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과 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흑인여성의 일 만은 아닌 거 같다.

같이 수업을 듣는 중년의 백인 남자 “D"는, 처음엔 에드워즈 (Edwards, 사퇴한 민주당 백인 남성 후보)가 ”자신의 이상에 딱 맞는 사람“이라며 칭찬에 열을 내다가 그가 사퇴한 후, 오바마 지지로 자리를 옮겼다.

”D"의 선택이 오바마가 정말로 그의 두 번째 베스트여서인지, 아니면 ‘여자보다는 차라리 흑인’ 이란 논리 때문인지, 힐러리 개인에 대한 ‘비호감,’ 또는 그녀 남편 클린턴의 재집권에 대한 경계 등등 때문에 한 '마지못한‘ 선택이었는지는 그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에드워즈 사퇴 이후 민주당 백인 남자들의 오바마 쏠림 현상 두드러짐" 이란 기사를 보면, “D" 의 진퇴양난이 그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어떤 엄마가 들려 준 딸내미들(재미교포2세)의 대화가 생각난다. 첫째 딸 (고등학생) 왈: “미국은 백인의 나라이니까 힐러리가 후보가 돼야지.” 둘째 딸 (중학생) 왈: “그렇게 말하면 인종차별이야. 하지만 나도 힐러리가 됐으면 해.” 셋째 딸(국민 학생) 왈: (무조건 이유 없이) “나는 힐러리가 좋아!” 세 아이 다 ‘흑인’ 오바마는 안 된다는 결론인데, 자기들의 후보 선호도에 인종 문제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관한 인식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의 대화가 단지 철없는 어린것들만의 것인지, 아니면 미국 대중의 선택과도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투표 참가자들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 나종미 약력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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