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음악 특유의 펑키 리듬 무주공산 가요계 휩쓸었다클래식·록 접목시킨 음악실험은 뜨거운 찬반논쟁 일으켜

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사라진 대중가요계는 무주공산 같았다. 대학생 밴드들이 그들의 공백을 메우고 세상을 지배했던 그때, 살아남아 프로의 진면모를 보여준 슈퍼 밴드가 있었다.

‘사랑과 평화’다. 당시 이들은 미8군 오디션 역사상 최고 등급인 Special AA를 받은 유일무이한 한국 밴드였다. 그들이 클럽무대에 서는 날이면 흑인병사들이 들이닥쳐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흑인음악 특유의 리듬감이 살아있는 ‘펑키’로 무장한 ‘사랑과 평화’는 당대 젊은이들의 어깨까지 들썩이게 했고 클래식에 록을 접목하는 음악실험으로 뜨거운 찬반 논쟁까지 불러왔다. 이들의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고 명멸의 인터벌이 짧은 대중음악계에 최장수 밴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76년 콧수염가수로 유명한 이장희가 명동 로얄호텔에 나타났다. 매일같이 최이철이 리드한 사랑과 평화의 전신 ‘서울나그네’의 연주에 몰입했다. 어느 날 최이철을 불러 “너희 밴드가 스타가 되는 걸 보고 싶다.

우리 녹음 한번 할까”라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장난스럽게 받아들여 잊어버렸건만 1년 후 진짜로 곡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팀명은 우리말로 짓기로 해 ‘홍길동’, ‘일지매’등이 거론되었지만 이남이가 제안한 ‘사랑과 평화’로 결정되었다.

녹음은 78년 초부터 이촌동 한강스튜디오에서 2채널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타이틀곡은 한국 펑키뮤직의 명곡 ‘한동안 뜸 했었지’. 재미난 사연이 있다. 곡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최이철이 녹음에서 빼려고 하자 이장희의 간청으로 타이틀곡이 된 숨겨진 이야기다. 대부분 곡은 한 여름에 작업을 했다.

마지막 녹음 곡 ‘어머님의 자장가’ 연주 때 너무 더워 멤버들이 웃통을 다 벗고 녹음을 했다. 엔지니어들은 특이한 음악만큼이나 자유분방한 멤버들의 모습에 ‘이상한 놈들’로 보는 분위기여서 다툼이 적지 않았다.

바로 잡을 것이 있다. 베이스 연주자로 음반에 명기된 사르보는 사실 활동만 같이 했다. 실제 연주자는 이남이다. 녹음작업 후 이씨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급히 영입된 송창식 백밴드였던 사르보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사연이 있다.

1집 수록곡은 김이환, 김명곤, 최이철 3명의 작품이다. 당시 대마법에 걸렸던 이장희는 자신의 이름으로는 일체의 활동이 금지된 상태였다. 그는 가명으로 곡을 발표했다. 김이환은 이장희의 의류사업을 도와주던 사람이고 이원호란 이름은 그의 아들이다. 2집에 등장하는 이경희란 이름도 모두 이장희의 가명이었다.

9곡의 수록곡 중 무려 4곡이 연주곡이다. 곡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베토벤의 ‘운명’이나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처럼 클래식을 록에 접목하는 실험적 욕구 때문이었다. ‘달빛’은 최이철의 마우스 튜브 연주가 압권이다.

지금은 크로스오버가 각광받지만 당시에는 ‘저것들이 클래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명곡을 망친다’는 따가운 눈초리가 분명 있었다. 그래서 음반 발표 후 “이게 무슨 음악이냐!”는 차가운 반응도 적지 않았다. 바로 잡을 재킷 제작과정의 오기가 있다. 뒷면을 포함 김명곡 편곡으로 되어있는 ‘한동안 뜸 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는 사실 최이철의 편곡이다.

음반이 발표되자 가요순위프로에서 3주간 연속 1위를 했을 정도로 1집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젊은 학생층에서 좋아했다. 경기여고 2학년생들은 급훈을 ‘사랑과 평화’로 정했을 정도. 결국 밴드로는 이례적으로 TBC 7대가수상, MBC 10대가수상 중창단 상, KBS 10대가수상은 78년 79년 2년 연속 받았다. 하지만 빛나는 음악업적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는 들국화, 산울림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있다.

2집 ‘장미’이후 87년 3집 ‘울고 싶어라’로 재기할 때까지 공백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내에 흑인음악을 전파한 선구자들임을 부정할 대중은 아무도 없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