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희생제물과 익명의 공모자들다이안 레인의 매력 물씬 풍기는 '다이하드'류의 영화집단적 광기에 대한 경고 스크린 곳곳에

4월은 나무엔 꽃이 피고 유원지는 인파로 만원이지만 극장가는 파리가 날린다. 봄의 절정 4월에 관객들은 극장보다 산과 바다로 발길을 돌린다.

극장 비수기인 4월에 개봉된 영화는 대부분 관객의 전폭적 지지를 받기 어려운 2% 부족한 영화로 채워진다. 하지만 우연한 행운도 4월의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극장에 배급되지 못했던 독립영화나 유럽의 예술영화가 틈새 기간에 극장으로 대량 방출되는 화제작들의 벼룩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대부분 4월의 극장에 걸린 작품은 매표수입을 올릴 수 있는 파워있는 스타보다는 옛 명성에 기대어 필모그라피를 기록해가는 중견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를 확인 할 수 있는 영화가 주류다. 한때 성적 매력으로 프레임을 채웠던 다이안 레인이 형사로 출연한 <킬 위드 미>가 눈길을 끌었다.

이 영화의 장점이자 성공 여부 8할이 다이안 레인의 연기에 달려있다. 다이안 레인은 이슬같은 청순함과 창부같은 요염함을 무기로 스크린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적 있다.

그리고 도발적인 이미지와 성적인 매력 하나에 의존한 무수한 미모의 여배우들이 영화계를 떠나는 동안 그녀는 연기와 매혹적인 눈빛을 유지하며 할리우드를 지켰다. 자신의 성적 매력을 살린 <언페이스풀>에서 질풍노도의 청년과 거침없는 정사씬을 소화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번에는 유일한 무기였던 성적 매력과 결별하고 특수 요원이라는 전사의 이미지로 변신하여 <킬 위드 미>에 출연하였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연기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모성애와 직업의식 강한 특수요원 역을 잘 소화해냈다.

아니 그녀가 지녀온 육체적 매력에다 자기 직분에 충실한 여성이 주는 아름다움까지 가미해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다이안 레인은 남성 관객의 시각적 볼거리로 동원되는 매혹적 배우에서 시나리오가 원하는 배역을 소화해내는 직업 연기자로 거듭난 것이다. 다이안 레인이 연기하는 머쉬는 살인자와 맞서는 특수요원과 딸을 자상하게 양육하는 수퍼우먼인 매력적인 배역이다.

스타와 장르의 만남은 영화의 완성도를 통해 성패가 갈린다. 스릴러는 ‘마지막 장면까지 관객의 손을 꼼짝 못하게 하면서 어떻게 장면을 이어가는가’에 승부를 건다.

영화 첫 장면에 신출귀몰한 살인자는 반드시 어리숙하고 느리게 추적하는 경찰에 의해 반드시 잡히는 것이 영화다. 쫓기는 자는 아무리 발이 빨라도 거북이처럼 쫓는 자에게도 잡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상업영화의 법칙이며 스릴러 장르의 철학이다. 이와 같은 공식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킬 위드 미>다.

이 영화는 이미 <다이하드>에 익숙해진 관객들을 위한 스릴러다. 흡사 <다이하드>의 인터넷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겨냥하는 것은 익명성의 폭력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스릴러의 대가 히치콕은 ‘갑작스러운 악의 출현과 평범한 시민의 일상적 삶을 위협하는 폭력 및 범죄’를 평생 영화의 양념으로 사용해왔다. 예측을 불허하는 살인자의 평범한 시민 납치 살해는 익명의 대중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살인의 향연을 벌이는 연쇄살인마와 이를 잡으려는 사이버 범죄 전담 특수 요원 제니퍼 머쉬(다이안 레인)의 게임같은 추격전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영화 서사의 전부다. 하지만 이면으로 들어가면 미궁이다.

익명의 살인자는 인터넷 사이트에 서서히 죽어가는 희생제물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많이 접속 할수록 빨리 죽는다”는 경고를 삽입하여 익명의 네티즌들이 공동살해에 공모하게 만든다. 인터넷의 익명성과 구체적인 가해자가 지워진 집단적 광기와 폭력에 대한 경고가 슬쩍 개입되어 있다.

살인자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 장면을 연출하여 동영상으로 송출한다. 결국 머쉬는 살인자의 정체가 자살한 교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희생자는 자살 사건을 방송했던 관련자들이며, 그들이 보복 살해당했음을 것을 알게 된다. 머쉬는 희생 제물로 감금되나 살인자와 대결하여 위기를 벗어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머쉬는 연쇄살인자를 해치우고 카메라를 노려본다. 그녀는 “나와 나의 동료를 사형대에 끌어올리는 일은 살인자가 수행했지만 네티즌과 관객들도 공모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항의한다. 우리의 희생을 즐기는 일이 그렇게 즐거운가라는 항의는 익명의 네티즌과 살인자, 특수요원의 게임을 바라본 관객들을 향한 부메랑이다.

필자와 함께 관람한 관객은 동료가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 답답한 머쉬의 심정을 계단에서 밖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잘 보여준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밑에서 촬영한 앵글도 그렇지만 여자의 후경에 하얗게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은 그녀의 내면이 공황상태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고 했다.

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화의 장점은 동어반복이 운명인 장르영화이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을 대하는 성실한 연출의 태도가 화면에서 배어나온다는 점이다.

홍상수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정리된 문장을 반복하려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자신의 연출 태도를 밝혔다. 대중영화 감독도 장르 공식을 필름에 옮기려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장르 관습과 독창성의 긴장 관계가 상업영화의 완성도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다.

감독의 땀의 역량이 드러난 대표적인 대목은 머쉬가 집으로 가서 짐을 싸서 이동하다 납치되는 장면이다. 머쉬는 집안에 누군가의 존재가 있는 것 같은 공포감으로 총을 꺼내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옷장 안에 살인자가 있을 것 같아 문을 열지만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은 공포영화에서 자주 보는, 문 안에 살인자의 존재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가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거짓 위협 장면이다.

공포감이 고조되었다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잠깐 이완될 때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다시 서스펜스가 생겨난다. 머쉬가 비상 전화로 전화를 걸고 다시 차로 향할 때 멈추었던 차의 와이퍼가 움직인다. 차는 공포의 공간으로 변하고 머쉬가 차 안에 진입하자 곧장 살인자에 의해 정신을 잃게 된다.

공포 영화는 살인 직전에 위협과 거짓위협을 효과적으로 배합하여 관객의 공포감을 부풀리는 일에 전념한다. 이 영화는 스타의 연기력과 모범생의 필기노트처럼 잘 정리된 장르 룰로 관객과 성공적으로 소통할 것 같다.

문학산 부산대 교수. 영화평론가

■ 문학산 약력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현 세종대 강사, 영등위 영화등급 소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저서 <10인의 한국영화 감독>, <예술영화는 없다><한국 단편영화의 이해>. 영화 <타임캡슐 : 서울 2006 가을>, <유학, 결혼 그러므로 섹스> 연출.


문학산 cinemh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