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맞은 백철·이무영·유치환 선생 가족이 밝히는 비화

5일 타계한 박경리 선생의 문학적 삶은 문학이 지닌 아름다운 힘과 진실, 감동, 인간애 등을 반추시킨다. 문학, 그리고 문학인이 위대한 이유다.

그러한 문학을 100년 이래 이 땅에 꽃피운 문학인이 있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김기림, 김정한, 김유정, 백철, 유치환, 이무영, 임화, 최재서 등이다.

최근 이들 문인들을 기리는 문학제가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9일 ‘2008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근대의 안과 밖’(주최 한국작가회의.대산문화재단)이라는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100년을 맞는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그림전(9월)’ ‘다큐멘터리 방영(10월)’ 등 다채롭다.

이번 행사에는 문인들의 가족들도 참여한다. 이들에게 문인들은 문학인이기에 앞서 한 가정의 아버지, 남편, 할아버지로서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백철 선생의 손녀와 이무영 선생의 딸과 부인, 유치환 선생의 손자 등을 만나 문학의 또다른 결을 들어봤다.

■ 손녀이자 후배 문학인으로서 할아버지를 기억하고파
백철 선생의 손녀 지혜 씨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쭉 함께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참 다정하시고 따뜻하신 분이셨는데 1975년에 제가 태어나고 76년 첫 돌 때는 ‘손녀기’라는 저에 대한 글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하셨어요. 또 제 동생 유치원 등.하교 길에는 항상 할아버지가 함께 해주셨어요.”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 백철 선생의 손녀 백지혜(32) 씨는 국문학을 전공해 현재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할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100주년을 기리며 할아버지 이야기를 풀어놓는 게 부담스럽다는 백 씨는 “할아버지가 글을 쓰시다 피곤하거나 지치실 때면 낚시나 수영을 주로 하셨다”면서 “문인 낚시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며 할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또 평안북도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생전에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저희가 예전에는 흑석동에 살았는데 비탈진 산 꼭대기였어요. 할아버지가 월남하시면서 북에 두고 온 어머니가 그리워 높은 곳에다 집을 짓고 자주 북쪽 하늘을 바라보셨대요. 또 집 앞마당에 유난히 과일나무가 많았는데 이 역시 북한에서 과실나무를 많이 길러서 따먹던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서 였어요.”

백 씨는 이어 “할아버지는 소설가 정비석 선생과도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셨다”며 “당시 같은 고향 출신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는데 정비석 선생 역시 북한이 고향이라 가족들끼리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백 씨는 백철 선생만의 독특한 집필습관에 대해 풀어놓았다.

“집에 할아버지 서재가 있었어요. 사실 서재는 할아버지가 손님을 접대하거나 간단히 편지를 쓰실 때 또 책을 읽을 때 주로 사용하셨고, 글을 쓰실 때는 꼭 건너편 작은 골방에서 조립식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셨죠. 할아버지는 또 글을 빨리 쓰시는 편이라 항상 모나미 플러스 펜만 사용하셨어요. 게다가 한번 집필하시면 몇 달이 지나더라도 꼼짝 않고 작품을 완성 하셨대요.”

할아버지의 특이한 집필습관 때문에 할머니 역시 고생이 많았다는 백 씨는 “할아버지와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10살 이상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했다”며 “글을 쓸 때면 다른 일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던 할아버지는 평소 미안한 마음에 여행이나 문학행사에 항상 할머니와 동행했다”고 전했다.

“사실 할머니께서 결혼 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고 하셨대요. 당시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고, 할머니 어머니께서 할아버지를 중매하시면서 두 분이 일찍 결혼을 하신 거예요. 그때가 1941년이죠.”

탄생 100주년 문인을 재조명하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손녀로서 또 후배 문인으로서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백 씨는 한편으론 “지금에 와서 문학이란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참다운 문학인의 길은 또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며 솔직한 심정을 밝혔고, 이어 앞으로도 꾸준히 선배 문인들에 대한 조명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였다.

■ 그림자 없는 사나이의 그림자처럼 한평생 살아
이무영 선생의 아내 고일신 여사

1956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이무영 선생이 부인과 함께 수상 기쁨을 나누고 있다.

“나하고 결혼하면 사흘을 굶어도 배고프다는 말을 안 해야…”

농민문학의 선구자 이무영 선생의 프로포즈다. 그리고 한달 후 고일신(94)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선생은 평생을,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 여사의 극진한 내조를 받는다.

“저는 황해도 지방의 부잣집 둘째 딸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가난을 모르고 지냈어요. 그러다 가난한 문인 무영을 만나 충청도로 시집을 갔는데 첫 만남 때 무영은 마른 몸에 새까만 피부, 게다가 얼굴에는 기미가 가득했어요. 고개도 안 들고 바닥을 보며 ‘굶어도 배고프다는 말을 안 해야 한다’고 우물쭈물 하더니 그게 청혼이었던 거예요. 문학을 좋아했던 저는 무영의 글과 생각에 반해 평생을 무영의 그림자로 살기로 결심하게 됐죠.”

젊은 시절 문학소녀 였던 고 여사는 결혼 후에는 이무영 선생 작품의 최초 독자이자 평론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무영은 누가 자기 글에 손대는 것을 무척 싫어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부분을 고치면 어떨까’, ‘이게 더 나은 것 같다’ 라고 하면 화를 내기는커녕 되려 ‘당신 제법인데’ 하며 칭찬을 해줬어요.”

지금도 남편이 자랑스러워 항상 이름을 부른다는 고 여사는 비록 생활은 궁핍했지만 단 한번도 무영을 원망하거나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사실 무영(無影)이라는 필명은 ‘자기는 그림자조차 없는 고독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사용하게 됐어요. 전 무영의 그림자를 자처하고 문인들 모임에 항상 동반하며 작가의 아내로 충실한 삶을 살았어요. 지금까지도 친분을 유지하며 무영의 삶을 기리고자 합니다.”

실제로 이무영 선생이 타계한 후 끊임 없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고 여사가 평생동안 애지중지 모아온 남편의 작품과 자료들을 손수 전집으로 만들어낸 것과 같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인에게 작품은 그의 전부요, 생명’이라는 고 여사는 이무영 전집에 이어 최근 이무영 선새의 대표작들을 모아 탄생 100주년 기념집을 펴냈다.

■ 함께 손잡고 나간 바닷가서 시인임을 느껴
유치환 시인의 외손자 김기성 씨

1960년 경주에서 찍은 유치환 시인 가족사진. 청마 왼편이 부인 권재순 여사. 뒷줄 왼쪽부터 장녀 인전, 삼녀 자연, 사녀 춘비

“외할아버지는 제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부산에 사셨는데 충무에 오시면 항상 저를 데리고 목욕탕엘 가셨어요. 할아버지는 목욕을 무척 좋아하셨대요. 또 바닷가에도 종종 갔었는데 어린 저를 옆에 두고 한참동안 서서 먼바다를 바라만 보셨던 게 기억 나요. 저는 그저 의아해 하며 ‘이런 게 시인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유치환 시인의 손자 김기성(50) 씨는 어린시절 할아버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함께 어머니와 이모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 통영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하셨을 당시 같은 학교에 윤이상 선생이 음악선생으로 계셨어요. ‘사위 삼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을 만큼 할아버지가 윤이상 선생을 무척 아꼈는데 그 때 윤이상 선생이 폐결핵을 앓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위는 못 됐지만 당시의 통영지역 교가나 동요들이 대부분 ‘윤이상 작곡.청마 작사’ 인걸 보면 듀엣활동을 꾸준히 하셨던 것 같아요.”

김 씨는 할아버지가 윤이상 선생을 자식처럼 아꼈다는 이야기와 함께 속 정이 많았던 유치환 시인의 젊은 시절 여인들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만해도 시인을 꿈꾸던 문학 소녀들이 할아버지를 많이 따라다녔다”면서 “그런 소녀들과 밤 늦도록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기던 할아버지 때문에 할머니가 고생이 많으셨다”고 말했다.

“지금은 팔순이 넘으셨지만 당시 국민학생 이었던 저희 어머니가 참다못해 할머니께 물으면 항상 할머니께선 ‘시인은 그래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여러 여인들이 할아버지와의 연서를 묶은 서간집을 출간하자 할머니는 며칠동안 앓아 누우셨다고 해요. 결국 참다 못한 어머니와 이모들이 출판사를 찾아가 회수, 절판 시키셨죠.”

유치환 시인이 타계하고 20년 정도가 지난 후에 편안하게 눈을 감은 그의 반려자는 마지막 가기 전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유치환 시인의 손자로서 김기성 씨는 지속적으로 탄생 100주년 문인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왜곡되거나 잊혀진 그들의 삶과 업적을 보다 정확히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하며, 자신이 직접 할아버지이자 유치환 시인의 삶을 조명한 전집을 곧 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