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라이프

고대사 다시 쓸 '기자조선' 유물 발견

고조선 영토 밝혀… 기자조선 실체 드러나… "고고학 최대의 신발견"
箕子(기자)를 나타내는 '箕'자가 새겨진 도기 발견
삼좌점 산성유적지는 기자조선 강역의 하한선
  • 출처: 중국인민대학 역사학원 개최 <하가점하층문화 산성유적지 考古> 강좌 중에서
중국에서 '2006년 중국고고학의 신발견'이라 칭하는 내몽고 적봉 지역의 '삼좌점(三座店) 산성 유적지'.

중국의 학자들은 그곳을 '동방의 마야' 또는 '동방의 트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된 고대 도기 조각 위에 새겨진 두 글자(사진 참고)를 보고 놀람을 금할 수 없다. 그것들은

시대상 우리나라 학계에서 고조선이라 부르는 시기의 명문으로 사진 왼쪽의 글자는 箕子朝鮮(기자조선)의 시조인 箕子(기자)를 나타내는 '箕(기)'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고조선의 강역을 실증하는 매우 중요한 고고학 문자학적 자료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중국에서는 하가점상층문화(BC8세기~BC3세기)의 것으로 파악 가능한 그 명문들에 대해 '문자'가 아닌 '각획부호'라는 용어를 쓰면서 은나라 이전 하(夏)왕조와 연결하여 하가점하층문화(BC2000~BC1500) 시기의 성숙한 문자류 부호라고 단정짓고 있다.

  • 표1: '箕(기)'의 옛날 글자체들. 오래된 시기인 우측에서 좌측의 순서대로 봄.
삼좌점 석성 유적지 발견

2005년 7~11월 초 내몽고 적봉시 삼좌점에서 대규모 종합 수리 공사 작업을 하던 중, 내몽고 문물고고연구소는 완전하게 보존된 산성 유적지 한 곳을 발견했다. 해당 삼좌점 유적지는 적봉시에서 서북쪽으로 40㎞ 떨어진 송산구 초두랑진 삼좌점의 음하 왼쪽 기슭 동자산상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병렬 연결된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면적이 약 1만㎡인 大성은 서쪽에 있고 근 1600㎡에 달하는 小성은 동쪽에 있다.

그런데 大성 성벽 140여 미터에 이르는 구간에서 15개의 말발굽형 마면(馬面) 석벽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마면은 성벽 바깥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돌출되게 건조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의 치(雉)와 동일한 형태의 것이어서 우리나라 학계에도 큰 충격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학계의 주장대로라면 이 삼좌점 석성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이어서 치를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성보다 무려 2,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 표2: '典(전)'의 글자체 변천.


그래서 놀람과 함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신랑망(新浪網)은 2005년 7월 29일 '적봉에서 4,000년 전의 산성유적지 발견'이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러나 고고학적 관점에서, 이 시기(하가점하층문화)에는 마면이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전 고구려연구회 서길수(徐吉洙) 회장도 그의 '하가점 하층문화의 석성 연구' 논문에서 "하가점 하층문화의 석성에 나타나는 치와 옹성, 해자 등은 모두 기원적인 형태로서 고구려를 거쳐 한반도로 흘러든다… 다만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고구려 석성까지 1,500년 남짓한 시간차를 메우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였듯이, 이처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의문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두 건의 도편 명문에 대해 중국의 적지 않은 고고학·고문자 전문가들은 문자냐 아니면 부호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껏 공통된 인식에 도달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삼좌점 산성 유적지의 발굴 담당자인 내몽고 자치구 문물고고연구소의 곽치중(郭治中) 교수는 "어찌 되었건 간에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에 이와 같은 성숙한 문자류의 부호가 존재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일개 중대한 발견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바로는 이것들은 부호가 아니라 주(周)나라 중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쳐 쓰였던 엄연하고도 분명한 문자이다. 정확한 문자 해독을 위해, 이미 발견된 상·주대의 갑골문 및 금문과의 비교분석을 실시해 보았다.

삼좌점 유적지의 명문 해독

  • 내몽고 적봉시에서 서북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삼좌점(三座店) 산성 유적지. 고조선의 유적이자 발해문명권에 속한다.
삼좌점 산성유적지에서 발견된 두 건의 도기 조각에는 이른바 옛한자(古漢字)인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다.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좌점 산성 유적지에서 발견된 첫 번째 도편 문자는 일부 획이 생략된 '箕(기)'자이다. 은나라 때에는 오늘날과 달리 '箕'의 자형에는 竹(죽)과 兀(기)자가 없었다. 순수한 '키'의 모습을 그대로 상형한 글자였다. 그리고 '箕'와 '其'는 의미상으로는 구별되었어도, 자형상으로는 동일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았었다. 위 은대 금문 ①의 '箕'는 국명에서 나아가 족명 또는 인명을 나타내고, 은대 갑골문 ②③④의 '箕'는 의미상 '其'자로써 갑골복사에서는 '키'에서 전이된 의미인 발어사, 어기사 혹은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다.

은대 갑골문의 특징 중 하나는 ②와 같은 '결각(缺刻)' 현상이다. 결각이란 문자를 새길 때 획을 빠뜨린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약자(간체자)이다. 이러한 결각 현상은 삼좌점 산성 유적지에서 발견된 도편 상의 문자에도 나타나니 ⑨가 바로 그것이다. ⑨에서 결각된 부위를 채우면, ⑦⑧처럼 주대(周代) 중기부터 춘추전국시대 때까지 보이는 '箕(其)'자의 금문과 동일한 자형임을 확인할 수 있고 그로써 유물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箕' 자에 대해 중국의 곽치중(郭治中) 교수는 "하부는 일개 '탁자'의 상형부호이고, 상부는 하나의 '솥'을 그린 상형부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설명은 '箕'자의 시대적 변천 과정과 고대의 결각 현상을 간과한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삼좌점 유적지의 문자 箕는 비록 도편상이긴 하지만, 주변에 다른 글자와 함께가 아닌 독립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어사'나 '어기사' 또는 '대명사'가 아닌 국명 혹은 인명으로서 '기자조선(箕子朝鮮)' 또는 '기자'의 뜻을 나타낸다. 도기의 문자는 해당 기물의 용도를 나타내니 이 箕자가 새겨진 도기는 기자용 제기로 판단된다.

  • 삼좌점유적지 돌담 밖으로 돌출된 '雉(치: 馬面)'사진의 출처: 內蒙古新聞網 2005. 7. 29.


삼좌점 산성 유적지에서 발견된 두 번째 도편 명문은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典(전)'자이다. 이 또한 획의 일부분이 생략된 결각으로 서주 중기 이후에 쓰였던 '典'의 자형이다.

은대 갑골문에서의 '典'은 '임금이 주는 책명'을 뜻하기도 하고 또는 '冊'자와 통용되기도 하였으며, '제품(=제물)'을 뜻하기도 하였다. <국어·주어(周語)> 등에선 '의례'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삼좌점유적의 典자는 '제품' 또는 제사의례용 기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2006년 중국고고학의 신발견'이라 일컬어지는 '적봉 삼좌점 산성 유적지'에서 발견된 도편상의 두 명문을 상주대의 갑골문 및 금문과 정밀 비교분석해 보면, '서주중기∼전국시기'에 사용된 '箕'와 '典'이라는 문자임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글자들을 문자 이전의 각획부호로 인식하고 나아가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이와 같은 성숙한 문자류의 부호가 존재했다고 본 중국 곽치중 교수의 시각은 오류이다.

살펴보건대, 종래에 이 글자들에 대해 중국을 위시한 세계의 많은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비록 상주대의 보편적 글쓰기 기법이지만 현대의 학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결각'의 자형이어서 판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편에 새겨진 명문은 유적지나 유물의 연대판정상 최우선시되는 공식적인 고고 발굴 실물자료이자 타임캡슐이다. 명문 '箕'와 '典'의 자형은 '서주중기∼전국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하가점하층문화가 아니라 하가점상층문화의 시기에 해당하며, 또한 고조선 중 구체적으로 기자조선의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명문 '箕'와 '典'은 해당 도기의 용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箕'는 기자조선의 시조인 '箕子(기자)'의 축약형으로서 '기자용 제기'를 뜻하고, '典'은 '제품'의 뜻으로서 '제품용 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삼좌점 산성유적지의 돌출된 '마면'이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의 형태와 매우 의미가 있는 관계에 있어 고구려성의 기원으로 확실시되고, 또 <구당서> 등에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해당 명문을 새긴 삼좌점 산성의 주인공들은 당연히 기자의 후손들일 것이다.

삼좌점 유적지는 고조선의 강토

다시 말해, 명문 '箕'와 '典'은 그것이 새겨진 도기의 연대와 기물의 용도를 입증하고, 기물은 삼좌점 산성의 주체를 증명한다. 은말주초의 위인이었던 기자를 향해 서주중기∼전국시기에 제를 올린 삼좌점 산성유적지는 마땅히 기자조선의 강역 내에 존재한 산성이다.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제왕운기(帝王韻紀)>, <조선왕조실록> 등 신뢰할 만한 수많은 역사서에서 기재된 바와 같이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후조선이다. 명문 '箕'와 '典'으로 인해 현재의 내몽고 적봉 삼좌점은 나아가 단군조선, 포괄적으로 말하면 고조선의 강토였음이 입증된다. 그리고 그 지역은 고조선 서쪽 경계의 상한선이 아닌 하한선이다.

이처럼 삼좌점 석성유적지에서 발견된 명문은 '서주중기∼전국시기'에 해당하는 기자조선의 유물임을 확인시켜 주는 새롭고도 중요한 고고 실물자료이다. 서주 중기에서 전국시대까지는 BC950여 년부터 BC221년까지이니 수많은 치가 발견된 삼좌점 석성의 연대는 그 상한선이 BC950여 년이요, 하한선이 BC221년이 된다. 따라서 치를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성과의 연대 차이는 천 년 이하이며, 하한선인 BC221년과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으니 1500∼2000년 차이로 인해 발생한 종래의 의문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일부 언론에 발표된 것처럼,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는 당연히 치(馬面)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에서 삼좌점 유적의 명문이 새겨진 두 건의 도편 모두를 하가점하층문화 유물로 단정한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삼좌점 산성유적지에 대해 기존 층위분석 및 탄소측정 등을 포함, 지금으로부터 4000~3400년 전의 유적지라 단정한 것 또한 전면 재검토를 요한다. 적봉 삼좌점 산성유적지는 현재의 영토를 초월하여 고대사를 기준으로 할 때 고조선의 강역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한국 고고학 최대의 신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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