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사랑, 희망의 서신을 전하다

이중섭 은지화 ‘낙원의 가족’(MoMA)
"어머님과 우리 가족의 마지막 소망은 따뜻한 남쪽나라(제주도)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5년 3월 이중섭의 둘째 아들 태성씨는 기자에게 자신과 어머니(이중섭 미망인) 야마모토 마사코(93ㆍ한국명 이남덕) 여사의 유일한 염원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7월 태성씨와 마사코 여사는 한국을 찾았지만 미술계의 불미스런 일로 남편(아버지)의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소망을 끝내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 마사코 여사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픈 표정과 태성씨의 쓸쓸한 모습은 아직 눈에 선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살아온 그들이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동인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이중섭일 게다. 더 정확히는 이중섭과 함께한 삶, 고단하고 궁핍했지만 그 처연하고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던 가장 '따뜻한 시절'에 대한 기억의 힘 때문이리라.

그 사랑, 기억의 힘은 식민지 청년 이중섭이 1835년 일본에 유학, 마사코를 만나면서 시작돼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포화속에 마사코가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 이중섭과 만나 결혼하면서 꽃을 피운다. 그러나 이어진 6ㆍ25 전쟁(1950년) 속에 가족은 고행길에 오르고 제주도에서 잠시 안정을 찾지만 이내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으로 가면서 이별한다. 이중섭은 오로지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며 작업하고 생활하다 지병으로 숨진다. 이중섭의 삶과 가족은 우리의 굴절된 현대사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낸 가족애와 사랑은 더욱 빛난다.

이중섭 은지화 ‘신문을 보는 사람들’(MoMA)
이중섭의 이 모든 것은 오롯이 작품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이중섭의 작품을 거론하면힘찬 소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정작 그의 작품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가족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이중섭이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마사코를 만나 가족을 이루며 평생 작가로 살다 숨질 때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대표 박명자)은 그러한 이중섭의 굴곡진 삶에 스며있는 보석 같은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잔잔한 감동으로 전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새해 1월 6일부터 내달 22일까지 열리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으로 국내에서 이중섭 전시는 1972년, 99년에 이어 세 번째 열리는 셈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은지화 3점이 60년 만에 한국에 처음 공개된다. 또한 이중섭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 20여점도 함께 전시돼 총 70여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뉘어 일본 유학시절 글을 대신해 사랑을 전했던 엽서화, 유화, 채색화,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화, 재료비가 없어 담뱃갑 속 은지에 새긴 은지화로 구성됐다.

결혼 전 마사코를 향한 연애 감정을 담은 엽서 그림은 그린 간결한 선묘와 데생력이 탁월하다. '활을 쏘는 남자'에는 마사코를 향한 이중섭의 열정이, '누운 여자'에는 아담과 이브에서와 같은 지순한 원초적 사랑이 읽힌다.

채색화에는 유독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봄의 어린이'등에는 두 아들과 자신을 어린이화한 '어른 아이'이중섭이 한데 어울리는 모습이 무척 다정스럽고 밝아 보인다.

유화엔 '가족'그림이 많다. '가족과 비둘기' '길 떠나는 가족' 등등. 세상과의 불화에 시달리던 이중섭을 그나마 지탱해준 건 바로 가족이다. 그의 가족 그림들에는 헤어져 있던 가족이 다시 하나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은지화는 지극히 가난했던 시절 이중섭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아로새긴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아서 맥터가트가 1955년 이중섭 개인전에서 구입해 MoMA에 기증한 3점이 60년 만에 국내에 들어와 선보인다. 2점은 '낙원의 가족' '복숭아 밭에서 노는 아이들' 등 가족이 도원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그렸다. 나머지 한 점은 '신문 보는 사람들'로 이중섭의 작품 중 드물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신문을 보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중섭의 미공개 편지 그림 20여 점에는 가족을 향한 간절함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이중섭은 편지의 글 귀퉁이에 그림을 곁들였고, 그림만으로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귀중하고 유일한 천사 남덕 군. 당신만으로 하루가 가득하다오. 마음속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포옹하고 있소." "전람회를 열어 그림을 팔아 돈과 선물을 잔뜩 사 갈 테니… 건강하게 기다리고 있어주세요", "더욱더 우리 네 식구 의좋게 버티어 보자"등등.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그늘에서 더욱 빛나는 얼굴이 이중섭과 그의 그림의 힘"이라며 "그가 우리 민족의 미술가인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고 말했다.

이중섭 ‘활을 쏘는 사람’(1941)
현대화랑은 이번 전시의 의미와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게 몇가지 장치를 더했다. 우선

전시실 한쪽에선 다큐멘터리 '이중섭의 아내-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 축약 편집본이 상영돼 '가족' '사랑'에 대한 감동을 더해준다. 이 영화는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 여사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12월 13일부터 일본 전역에 상영되고 있다.

또 이중섭 네 식구가 제주에서 살았던 4.3m²(약 1.3평) 골방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전시했다. 전시실 출입구 옆 벽에는 메모판을 설치해 관람객들의 전시에 대한 감흥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했다.

화랑의 정성에다 이번 전시가 전하는 '가족' '사랑'의 메시지가 잔잔한 울림을 주며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중섭이 시련의 시기에도 '희망'을 그린 것이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주며 또 다른 '희망'을 갖게 하고 있다. 02-2287-3591

본 기사는 <주간한국>(www.hankooki.com) 제256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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