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驪 → 高句麗 → 高麗ㆍKorea 변화

高麗의 정음은 ‘고례’와 ‘고리’. ‘고려’는 조선 중기 이후의 속음.

13C 동방견문록 Cauly로 표기…19C Corea로 통일, 1884년 Korea로 바뀌어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자유아시아방송은 10일 “최근 북한당국은 외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의 원산지를 Made in Korea로 통일할 것을 지시했다고 현지 소식통들은 이야기했다”고 보도했다. 자강도의 한 소식통은 자유아시아방송에 “올해 1월 8일 해외에 수출되는 경공업제품들에 Made in DPR of Korea 대신 Made in Korea라는 새로운 표기법을 적용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고 전했다. 사실이라면 향후 국제시장에 혼란이 올 것이 자명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남북한의 영문명에 함께 사용되는 Korea는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高麗)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고려는 우수한 제품의 고려자기와 고려인삼 등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13세기 들어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고려를 Cauly로 표기하여 그 명칭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다. 그 후, Cauly 외에 Coree, Coray, Corea 등 다양한 표기가 쓰이다가 19세기에 Corea로 통일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가수 윤도현과 송골매가 불렀던 “오 필승 꼬레아!”처럼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Corea의 음은 ‘코리아’ 보다는 ‘꼬레아’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Corea가 아닌 Korea라고 표기할까? 오인동 박사 저 <꼬레아, 코리아>에 그 내막이 자세히 실려 있다. 1882년 미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후 우리나라를 계속 ‘Corea’로 표기하다가 1884년부터 포크 대리 공사가 별다른 설명 없이 ‘Korea’로 바꿔 쓴 이래, 지금의 Korea 표기로 굳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세계초강대국의 영향력이 19세기의 통일 표기인 Corea를 누른 것이다.

이처럼 Korea는 高麗의 영어식 표기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高麗는 高句麗(고구려)의 약칭인 高麗에서 비롯된 말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고구려의 적통을 잇는 나라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국호를 계승한 것인데, 高句麗의 麗는 본래 馬(말 마)가 덧붙은 驪(가라말 려·리)자였다.

고구려를 건국한 이는 천제이자 북부여 왕이었던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주몽(朱蒙)이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이 朱蒙의 또 다른 명칭이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석에 적혀있는데 바로 鄒牟(추모: 옛음은 ‘주무’)이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우리나라 및 중국의 여러 사서들을 종합하여 고구려 개국 당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를 건국한 鄒牟왕은 본래 북부여 출신으로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어느 날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순행(피난)하다가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졸본)에 이르러, 그 나라 왕의 둘째딸을 아내로 삼아 정착했다. 그는 부여의 후예인지라 ‘홀본(졸본)부여’를 세웠다가, BC37년에 홀본 서쪽에 있는 산 위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을 쌓아 도읍을 세운 후, 나라 이름을 ‘高句驪’로 개칭하였다.

高句驪의 高(높을 고)는 산위에 세운 높은 나라와 높은 신분을, 句(어릴 구)는 蒙(어릴 몽)을 쓰는 건국자 朱蒙(주몽)과 夫(어른 부)를 쓰는 夫餘(부여)의 뒤를 이음을, 驪(가라말 려)는 흑색천리마의 주산지임을 연상시킨다. 高句驪의 간칭은 高驪 또는 句驪이며, 驪자는 후에 麗로 약자화된다. 따라서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동이전>의 동옥저전 “현도(玄菟)는 이맥이 침략하여 군을 句麗 서북쪽으로 옮겼다”에서의 ‘句麗’는 작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훗날 句麗가 된 곳’의 의미로 삽입한 高句麗의 간칭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高句驪’란 말은 주몽이 작명한 것이지, 주몽 이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토벌하고 한사군을 세울 당시 이미 있었던 명칭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 이를 주몽이 건국한 高句驪와 별개의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고구려? 고구리?

한편, 고구려의 ‘麗’자에 대해 일부 사전에서는 국명일 때는 ‘리’로 발음한다고 적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高句麗를 ‘고구리’가 아닌 ‘고구려’로 읽고 있다. 그 연유와 근거에 대해 사단법인 한배달의 박정학 회장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2월 17일 교육부에 질의했다. 2월 24일자 국사편찬위원회 기획협력실 담당자(박남수)의 답변은 ‘고구려’만이 정답임을 강조한 다음과 같다.

“고대 우리 민족이 이를 ‘려’로 읽었다는 것은,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산(泉男產) 묘지명(702)에서 고구려를 ‘구려(句驢)’하고 한 데서 분명하게 보입니다. ‘驢’는 바로 우리의 독음 ‘려’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麗나 驪, 驢 모두 우리 음을 따서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세 글자는 모두 동일한 음을 딴 것입니다. 그러므로 ‘高句麗’라는 우리 음은 ‘고구려’임이 분명합니다… 驢는 우리 옥편에 ‘나귀 또는 당나귀 려’ 이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麗나 驪, 驢가 모두 우리 음독으로 ‘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高句麗(驪)의 약칭인 ‘句麗’와 ‘句驪’ 외에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산의 묘지명에 있다는 ‘驢(나귀 려)’자의 또 다른 ‘句驢’를 결정적 근거로 제시한 답변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천남산묘지명에 새겨진 고구려는 ‘句驪’이지 결코 ‘句驢’가 아니다. 일찍이 위 묘지명에 대해 葛城末治(1935: 朝鮮金石攷), 이난영(1968: 韓國金石文追補), 허흥식(1984: 韓國金石全文)은 모두 정확히 ‘句驪’라 판독했음에도 숨기고, 박한제(1992: 韓國古代金石文)가 ‘句驢(구려)’로 오판한 것만을 유력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국가교육을 담당하는 공직자로서 해서는 안될 허위답변이자 기만행위다.

우리나라의 정음은 중국과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중국의 음운서인 <광운(廣韻)>과 <집운(集韻)>의 ‘麗’ 조항에 분명히 “高句麗 東夷國名”과 그 발음 ‘리’와 ‘례’가 적혀있다. 이는 세종대왕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동국정운(東國正韻)>에서도 마찬가지다. 高驪·高麗의 ‘驪·麗’는 국명 고구려·고려를 나타낼 때 정음이 ‘례’와 ‘리’ 둘 모두이다. 즉, “옛날옛날 고례적에”라는 할머니 이야기처럼 ‘고례’와 ‘고리’의 두 정음이 함께 통용되었다. 이 ‘고례’와 ‘고리’는 옛날 유럽에서의 표기 Coray 또는 Coree와 서로 일치한다. 高句麗를 우리 조상들은 ‘고구례’라고도 했고 ‘고구리’라고도 불렀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이래 정음정신의 쇠퇴로 ‘례’의 변음 ‘려’가 주로 쓰이다가 ‘고구려·고려’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박대종

*사진설명

천남산묘지명(泉男產墓誌銘)의 “句驪” 부분.

高句驪의 준말로 정음은 ‘구례’ 또는 ‘구리’.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