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쇼 무대를 주름잡는 신인 가수가 등장했다’는 소문을 들은 킹레코드 박성배사장이 동대문극장 무대로 찾아와 음반취입을 요청했다. 공연을 펑크 낼 수가 없어 다음날 마장동 스튜디오로 갔다. 작곡가 오민우, 작사가 전우, 하청일이 소속된 밴드 샤우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취입 곡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라 황당했다. 만두 국으로 점심을 먹을 때 작사가 전우가 “하운드 독을 어떻게 부르냐?”고 물었다. 노래를 불러주자 즉석에서 가사를 쓰고 제목을 ‘사냥개’로 정했다. 대표 곡인 ‘허무한 마음’도 작곡가 오민우의 피아노 반주로 몇 차례 듣고 멜로디를 외워 곧바로 동시 녹음에 들어가 이틀 만에 끝냈다.

녹음 후 지방공연을 순회하던 중 킹박이 대전으로 찾아와 앨범 재킷사진 촬영요청을 했다. 공연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상경해 국도극장 앞에 있던 사진관에서 촬영을 마쳤다. 일주일 후 부산 공연 중에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어리둥절했다. 1966년 10월 데뷔음반 ‘정원과 샤우더스’가 발매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던 것. 타이틀곡인 ‘허무한 마음’이 빅히트를 터트리자 킹박은 정원의 프로젝트 음반을 연이어서 찍어냈다.

당시 보따리장수 수준의 제작자 킹박은 홍보를 제대로 못했다. 음반이 인기리에 팔려 나갔던 것은 방송출연 기회를 잡지 못한 정원이 보다 못해 음반을 들고 심지다방 등 다운타운을 돌며 홍보를 직접 했기 때문. 이후 ‘미워하지 않으리’, ‘내 청춘’등 발표하는 음반마다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지만 돈 한 푼을 받지 못한 정원은 그랜드레코드로 전속사를 옮겼다. 다급해진 킹박은 60만원의 거금을 들고 찾아갔지만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1966년 12월 트위스트 김, 현미, 한명숙, 이미자, 박재란, 이금희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과 함께 한영모감독의 음악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출연했다. 영화는 유료관객 5만명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두자 1967년 영화 ‘금송아지’의 주제가,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취입요청이 밀려들었다. 또한 심호섭 감독의 음악영화 ‘청춘은 즐거워’에 이태신, 트위스트김, 남석훈, 김세레나 등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극장쇼와 영화를 통해 인기를 다졌지만 방송출연을 못했던 정원의 노래는 단 한 곡도 방송의 인기차트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극장 쇼 무대의 슈퍼스타로 군림한 정원은 청와대 행사에 단골로 초대 받았다.

아픔도 있었다. 흐느끼는 창법으로 노래한 빅 히트곡 ‘내 청춘’이 창법저속으로 금지되었던 것. 1967년부터 2년간 최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방 신문사, 방송국의 10대가수상을 무려 50여개나 수상했던 것. 그 여파로 1969년 4월 빅 히트곡 ‘허무한 마음’이 정창화 감독에 의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뛰어난 작품성을 선보였던 이 영화는 2003년 부산영화제 정창화감독 회고전 때 재 상영되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전속사를 아세아로 옮긴 정원은 1971년 메이저인 오아시스로 다시 옮겨 ‘울지 않으리’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갔다. 성인여성 팬이 많았던 그는 인천의 유지였던 연상의 여인과 뜨거운 스캔들을 뿌리기도 했다. 직설적인 정원은 패싸움이 나면 앞장섰던 의리의 가수였다.

방송을 기피했던 정원은 TBC 가요상 수상자 선정을 놓고 사전에 수상자를 정해 놓은 방송사측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이후 가요계 풍토에 환멸을 느껴 수상했던 트로피, 음반, 사진을 모두 없애버리고 80년대 초 부동산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선배 대접을 주었던 후배가수 나훈아의 초청으로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생전의 고인은 “젊은 시절 충분히 연습을 못하고 음반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 때문에 지금도 내 노래를 음반으로 듣는 게 싫다. 적어도 방송에서는 가수들 족보를 정확하게 알고 선후배의 순서만큼은 지켜주면 좋겠다.”고 불편한 속내를 털어 놓았다.

대중가요계를 떠나 경기도 광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가끔 시군에서 개최하는 무대에 올랐던 정원은 2000년대 들어 복고문화 열풍을 타고 방송과 공연을 활동을 재개했다. 2004년 초 신보를 발표한 그는 2014년 '제2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활동에 의욕을 보였지만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ㆍ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