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벽화고분>(돌베개)…최고 권위자의 30년 연구성과 담겨

고구려는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정작 그 실체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고구려에 대한 우리의 정사(正史)가 없는데다 중국 사서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까닭이다. 그것도 중국 수(隨)ㆍ당(唐)과의 전쟁, 나당 연합군에 의한 멸망 등 전사(戰史)가 대부분이고 일부 왕들에 관한 것들이다.

지배 계층에서 일반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인들의 생활과 사고, 종교, 대외관계 등 그들의 삶과 정치에 대한 기록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런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나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고분벽화다. 그 벽화를 담은 구조물인 벽화고분은 우리와 고구려 시대와의 대화를 위한 가장 귀중한 통로이다.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의 권위자인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최근 벽화고분의 변화상과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한 <고구려 벽화고분>(돌베개)을 펴냈다.

이번 책에서 전 교수는 30년 가까이 연구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고구려 초ㆍ중ㆍ후기의 무덤과 벽화양식을 대표하는 10기의 벽화고분을 꼽아 세밀하게 소개한다.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벽화고분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입체적 접근이다. 벽화에 담긴 세계상, 우주관, 생활상을 깊이 읽어내면서 고분을 축조하고 벽화를 새긴 시대의 맥락을 꿰뚫고 있다. 다시 말해 4∼7세기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사와 문명 교류, 그에 부응한 예술과 정신세계의 흐름과 영향을 일관되고 개방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미천왕(300∼331)에서 소수림왕(371∼384), 광개토대왕(391∼412) 재위 기간 중국 집안(集安)의 국내성을 중심으로 크게 융성했고, 장수왕(412∼491) 시대 427년 평양 천도 후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때문에 고구려 시대 고분과 벽화는 중국 집안권과 북한 평양권으로 양분할 수 있다.

초기 고구려 벽화는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에서처럼 생활풍속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무덤 주인이 현재와 큰 차이가 없는 세계에서 내세의 삶을 꾸린다고 믿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고분의 주인과 관련해선 연(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수인지, 아니면 고구려 왕(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이거나 대귀족이지는 아직 국제적 논쟁거리라면서 저자는 묵서명(墨書銘) 등을 근거로 전자 쪽에 무게를 둔다.

고구려 중기 벽화고분인 안악2호분, 수산리 벽화분, 쌍영총, 삼실총, 장천1호분 등의 공통점이자 특징으로 저자는 다양성과 보편성 속의 독자성.고유성을 든다. 즉, 당시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보편적 문화(불교신앙 등)와 고구려의 개성(사신도 등)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이다.

후기 벽화고분에는 장수왕 서거 후 대외 정세의 악화와 내부 권력투쟁으로 사회적 불안이 확산된데 따른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반영돼 있다. 개마총과 진파리1호분에서처럼 무덤 주인의 세계를 지켜주는 사신(四神)과 천장에 그린 불사(不死)의 하늘 세계가 두드러지고, 벽화 구성과 묘사에 일관성이 떨어진다. 집안 통구사신총 벽화는 힘을 잃은 모습이 뚜렷하다.

저자는 같은 후기 벽화고분임에도 북쪽 국내성의 통구사신총과 남쪽 평양권의 개마총, 진파리1호분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즉, 국내성의 고분벽화는 화려한 색상과 강한 필치를 사용했으나, 평양의 벽화는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7세기 전후 대표작인 강서대표, 강서중묘를 끝으로 고구려 고분벽화는 사라진다. 7세기 초부터 수, 당과의 전쟁에 고구려 사회의 모든 역량이 쏟아 부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고분은 시대에 따라 고구려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고, 고구려의 대내외 관계, 시대상과 문화교류 등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책은 300여 장의 도판과 함께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 고분을 시기, 지역별로 정리해 이해의 편의를 돕는다. 또한 동시대 국가들의 벽화고분과 비교하는 등 풍성한 정보를 제공한다.

박종진 기자

#사진 설명=책 이미지(입체)

-덕흥리 벽화고분. 북한 남포

-강서대표 ‘청룡’ 벽화. 북한 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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